참으로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 서울 세실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김혜자의 모노드라마 ‘셜리 발렌타인’. 한달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긴 기다림 끝에 서울행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며 극장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30분. 연극이 시작되는 7시 30분까지 나는 커피를 마시며 로비에 앉아 있었다.

중년의 여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명동 멋쟁이처럼 차려 입은 여인도 있었고 처음 외출인 듯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불안스럽게 서성이는 여인도 있었다. 여럿이 둘러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여인들도 있었고 혼자 들어와 팸플릿을 뒤적이며 시간을 자꾸 확인하는 여인도 있었다. 그녀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얼굴 생김, 옷차림만큼이나 살아온 삶도, 생활환경도, 성격도 다르겠지만 셜리 발렌타인을 통해 발견하게 될 자신의 모습은 거의 비슷할 지도 몰라.

공연 10분전 객석이 꽉 찬 것은 물론이고 계단마다 두 개씩의 보조 의자가 놓여졌다. 예약하지 않고 온 관객용이었다. 둘러보니 두 서너 명의 남성이 눈에 띌 뿐 모두 4, 50대 중년의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이 연극에서 모두 무엇을 기대하기에 이렇게 몰려와 여섯 달째 성황을 이루는 것일까. 드디어 객석에 불이 꺼지고 무대가 열렸다.

평범한 연립주택 부엌, 저녁을 준비하던 마흔 다섯 살의 셜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일한 대화 상대자인 벽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셜리의 독백을 숨죽여 바라보면서 객석은 점점 작게 흔들리는 한숨 소리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그대로 내 가슴에서 늘 부글거리면서도 한 번도 소리로 내뱉어보지 못한 바로 그 소리들이었다. 셜리의 목소리로 내 안의 내가 무대 위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45살에 잊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찾아 그리스로 떠난 셜리 발렌타인. 그리스에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는 셜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내게도 꿈이 있었나? 내가 살아갈 이유를 나는 알고 있는가? 불이 꺼진 무대를 바라보면서 나는 오랫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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