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50년의 오늘! 우리가 어찌 그날을 잊을 수가 있으랴! 민족 최대 비운의 날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반세기를 사이에 둔 세월의 흐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있는 듯 하다. 그날을 몸소 겪었던 세대들과 그 이후 세대간의 느낌은 사뭇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틴뉴스 메거진, ‘포브틴’이 지난 5월 10일부터 16일 사이에 서울지역 중·고등학교 학생 239명을 대상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 6·25는 언제 일어났을 까요?’ 라는 물음에 1950년이라고 정담을 말한 학생은 58% 이었고, 나머지 42%는 답변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북통일에 대해서는 찬성이 45%, 반대가 40% 이었으며 나머지 15%는 잘 모르겠다고 답변, 한 세대 전만 해도 필연으로 받아들여졌던 통일 문제가 선택의 문제로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 주었다.

통일에 찬성하는 가장 큰 이유는 ‘통일을 통해 세계 강국이 될 수 있다’가 43%로 가장 많았고, 한 민족이기 때문(37%),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9%), 순으로 나타나 민족 동질성 회복보다는 실리를 더욱 중시하는 청소년시대의 가치관을 반영했다는 평이다.

이 같은 실리중시의 가치관은 통일을 반대하는 이유에서도 그대로 적용돼 ‘남한의 경제적 손실’이 통일 반대의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됐다.

다시 말해 중. 고등학생 10명 중 4명이 한국전쟁 발발연도를 맞추지 못했으며, 남북한간의 통일에도 반대하는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국내 역사 교육 전반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 심각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전후 세대들에게 그날을 참상과 의미를 알려주는 게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다.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민간인의 경우 한국인 99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다.

이중 상당수는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기간 중 ‘인민재판’ 등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 기간 중 북한은 8만5천 명에 달하는 대한민국의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납치해 가기도 했다. 이 가운데는 국회의원 등 정치인과 저명한 학자, 종교인, 공무원 등이 상당수 포함됐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 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삶을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남겨 둔 채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당시 북한 지역 인구 1천 2백만 명중 4분의 1 정도가 북한을 탈출 남하하였던 것이다.

전쟁 발발 3년 후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사령관 간에 휴전이 조인 됐다. 휴전협정은 정전을 하며, 쌍방간의 비무장지대 설치, 38선의 약간 북쪽을 통과하는 군사경계선 설치, 군사와 장비의 증강금지 등을 규정하였다. 이 목적의 준수를 감시하기 위한 <군사정전위원회>설치되고 동 본부를 판문점에 두었다. 그후 반세기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실정에 대해 월남한 한 70대 노인은 “말문이 막힙니다. 모든 게 허망할 뿐입니다. 통일에 대한 찬·반이야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그날을 어찌 학생들이 모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거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1950년의 그 날을 어찌 그 부모들이 일러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컴퓨터, 노래방, 채팅, 원조교재 등에는 익숙하고 민감한 청소년들이 우리 민족이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라며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그야말로 기억하기는 싫지만 6·25전쟁이 1950년의 그날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오늘날 곳곳에 상처로 남아 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