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인사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혹독하게 비난할 때 흔히 쓰는 말이 있다. 바로 ‘유신의 부활’이니 ‘공안통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선출된 대통령이지만 정통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아버지를 닮아서 독재를 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전술로 들린다. 최근엔 민주회복이라는 말까지 사용함으로써 독재정치라고 단정 짓고 있다. 문제는 아무리 박근혜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해도 국민이 공감하지 않으면 욕을 한 사람만 손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이를 반증하듯 박정희 대통령 추도식에선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유신시절이 좋았다는 추도사가 나오기도 했다. 민생은 팽개치고 얼마나 정쟁에 몰두했으면 유신을 미화하는 말까지 나왔겠느냐고 동조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유신 미화 발언에 대한 논란을 하기보다는 그 당시로 올라가 장단점을 따져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유신 시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꿈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학교에 갈 수 있었고,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은행원, 교사, 경찰관 등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몇 년간 절약하면 집도 살 수 있었고, 자가용도 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았다. 그리고 유신 시대에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비록 배는 고팠어도 어른과 애의 구별이 있었고, 이웃을 보살피는 인정도 넘쳤다.

자식이 부모를 패는 게 예사이고, 죽이는 일까지 생겨도 놀라지도 않는 세상은 결코 아니었다. 혼자 사는 이웃이 죽어도 모를 만큼 몰인정한 사회는 더욱 아니었다. 한마디로 인륜이 무너진 사회다.

적어도 유신 시절엔 지금처럼 폭력이 난무하진 않았다. 대낮에 조폭이 날뛰고, 술장사라도 하려면 주먹의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조폭은 자리를 잡았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법에 호소하는 것보다 주먹을 통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특히 그 시절엔 지금처럼 음란하지는 않았다. 성욕을 느껴야 할 대상이 있고, 절대 안 되는 대상도 분명했다.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음란해졌으니 짐승만도 못하다는 소릴 듣는 게 아닌가.

또 있다. 그 시절엔 새벽종이 울리면 빗자루를 들고 나가 청소를 했다. 내 집 앞까지 청소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물론 자유가 제한되기도 했다. 깡패는 잡아다가 국토건설단에 보냈고, 야간엔 통행을 금지해서 강도, 도둑, 불량배들이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서민의 생업을 돕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헌법을 유린한 원죄가 있음에도 유신 찬가가 나오는 것은 민생은 외면한 채 정쟁에 몰두한 야권이 자초한 게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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