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가끔 옛 물건들이 진열된 골동품 상가에서 내 눈길을 반갑게 잡는 것은 나무재질로 된 책상들이다. 더구나 세월의 더께가 한참 내려앉은 손때가 묻은 책상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치도 없이 한참을 쓰다듬다 상점 문을 나서곤 한다.

책상 위를 보면 책상 주인의 성품과 그가 무슨 공부를 하며 세상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냐를 짐작할 수 있다. 시험이 임박한 수험생의 책상 위는 수험문제집이나 그 관련 책들이 온통 차지하고 있고, 전문 서적들로 빼곡한 서가를 보면 책상의 주인이 어떤 것을 전공 하는지도 대충은 알 수 있다. 가지런하게 꽂힌 책의 등을 보고서도 책 주인의 성격이 차분한지 꼼꼼한지 덤벙인지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어린날 유독 형제들이 많았던 우리 집은 아이들 수대로 책상을 마련해 줄 수도 없었고, 큰 아이들 기준으로 책상들을 부모님이 배정해 주셨으니, 막내에 속하는 나는 부모님과 한방에서 오래도록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혼자만의 책상이 없는 동생들과 나는 식구들 밥상이던 두리반이 우리들 책상 대용이었다. 어쩌다 아랫동생과 같이 두리반을 쓰다 보면 펴 놓은 책과 공책이 겹쳐져 서로 자리 다툼으로 눈을 치뜨며 신경전을 일삼는 것이 예사였다.

내 단독 책상은 중학생이 돼서 마침 취직을 한 큰 오라버니의 책상을 물러받고 부터였다. 오라버니와 십 수년 함께 한 책상은 성한 곳이 거의 없는 전장 터에서 막 돌아온 만신창이 패잔병 같았다. 그런 책상을 아버지는 다시 못을 박아 튼튼하게 손을 보고 흠집투성이 책상에 칠을 해 감쪽같이 새것으로 둔갑시켜 줬다.

그 책상 위에는 내 질풍노도 속 사춘기를 함께 한 헤르만 헤세가 있고, 치열했던 스무해의 푸른 청춘의 고독도 있다. 그렇게 책상이라는 나만의 고유 명사는 죽은 생명체가 아닌 유기체처럼 내 삶의 어느 갈피에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저런 몸의 이상 징후나 건강 검진으로 집근처 S내과를 찾을 때가 있다. 병원을 찾은 환자와 건강 검진 자들로 북적이는 S내과는 그 많은 내원 자를 만나면서도 진료하는 원장님은 언제고 온유한 성품을 잃지 않는다. 대부분은 간단하게 진료를 끝내고 처방전을 받아 나오는데 며칠 전에는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원장의 책상 위로 무심히 내 눈길이 갔다. 그의 컴퓨터 앞 책상 위에는 진료자료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다. 원장의 수많은 고심 속 진료기록의 시간들이 거기에 쌓여 있다. 나도 모르게 원장님의 치열한 시간이 저기에 쌓여 있네요. 하니 선생은 치워야 하는데 바빠서 하며 겸연쩍게 소년처럼 웃는다. 선생은 내 말을 자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여긴 것 같았다. 노고에 대한 칭찬을 에둘러 말한 것인데, 치열을 치워야 한다고 들은 것이다. 선생과 서로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말 때문에 한바탕 유쾌하게 웃음을 나누며 진료 문을 나선다.

혼신의 노력이 보이는 치열한 시간은 아름답다. 그런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상 위를 보면 나도 모르게 이제는 머나먼 뒤안길의 추억 같은 내 책상의 수많은 시간들이 아련하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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