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속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속에 묻는다고 했다.

어떤 부모를 막론하고 자기 자식 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겠는가. 물질 만능의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혼탁해지는 도덕성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륜을 어기고 천륜을 져버리는 부도덕한 생활 풍토가 만연된다면 살벌한 세상에서 인간의 참다운 삶이 깨어지는 통곡의 함성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하지 못해 자식 제한이 힘들어 생기는 대로 다산생산을 하였고 가정마다 좋든 싫든 많은 자손이 번창해 가속된 인구 증가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 오늘과 같은 과대한 자식 보호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성장과 교육에도 부모로서는 마음뿐이지 크게 투자할 능력이 없어 어느 정도 철들 나이가 되면 홀로서기를 해야만이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인위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실천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인구 억제 정책에 동참하면서부터 많은 자녀를 생산한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 자녀가 많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눈총이나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갖게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옛날에는 자식을 낳기만 하면 쇠똥 밭에 굴러도 자기 밥그릇을 스스로 챙긴다고 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주변 여건과 환경이 성장 과정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처럼 온실에서 과잉보호하는 자녀 교육은 모두가 그렇듯이 돈으로 교육을 시키고 돈으로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자식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은 돈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인성 교육이 돈으로 해결되면 천한 교육 밖에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외와 기본적인 도덕성이 돈과 연계되는 교육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재물로 만들어진 교육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기본 바탕을 흐리게 만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체할 수 없는 부동적인 사고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예기치 않은 피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폭발물을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인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존파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지존의 사전적인 의미는 아주 존귀하다는 뜻으로 옛날 궁궐에서 임금을 높이는 최상의 고급스런 단어라고 보면된다.

이처럼 고귀한 지존이 돈을 목적으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불에 태워 내동댕이치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함을 저질러 세상을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 사고들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민심을 야박하게 만들면서 믿음이 사라지고 불신 풍조가 만연되는 막가는 세상에 다다른 느낌에 사로잡히는 솔직한 심정이다.

사회 풍토가 예의범절과 도덕성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믿음이 사라지고 서로를 경계하는 전투적인 위기감에 사로잡혀 아슬아슬한 삶을 지탱하는 오늘에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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