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은 꿈에도 죽음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겠지만 중년을 넘은 내 나이에는 간간히 주변에서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가까운 지인의 암 말기 선고는 충격적이었으며, 죽음이란 아스라이 먼 것이 아님을, 내 삶 골목 어귀쯤 불현듯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죽음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의 진동이 숙제처럼 도서관 서가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삶의 다른 이름, 영원한 짝인 죽음에 대한 사유의 시작을 톨스토이의 이 책으로 삼기로 한다. 

톨스토이의 중단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세계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메멘토 모리’(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나이 41세에 고통과 죽음, 인생의 허무함으로 극도의 정신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을 전면적으로 바꾼다.

그동안 세계적 문호로 살았다면 나머지 반평생을 인류의 스승으로 극도의 영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그런 톨스토이의 고뇌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가장 밀도 있게 찾기 위해서 죽음을 이해해야한다. 죽음은 단순히 물리적인 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 전체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목적, 방법, 가치를 가장 잘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 장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동료들에게 통보되자, 이들은 그를 애도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이해득실을 계산하는데 열중한다.

가족들도 죽어가는 이반을 귀찮아하고, 의사들은 무능하고 형식적인 말들만 내뱉는다. 

진심 어린 친절 하나없이 이반은 철저한 고독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과 운명을 저주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그 순간, 이반은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히 눈을 감는다. 

바로 이때 이반 일리치는 마침내 기어나왔다. 그리고 빛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의 인생이 잘못됐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됐다.

“그런데 죽음은 어디 있는가? 그는 이전의 익숙했던 죽음의 공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이 어디에 있는가? 무슨 죽음? 그 어떤 공포도 없었다. 왜냐하면 죽음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인간은 이반 일리치처럼 죽기 두 시간 전에라도 홀연히 광명을 발견할 수 도 있다. 그것이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이라도 죽는 순간까지 삶을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다. 이는 한편, 인간적 삶의 희망을 보여준다. 

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아무런 잘못없이 평범한 삶이라 하더라도 성찰하지 않는 삶은 죽는 순간 편안하게 눈감을 수 없다는 톨스토이의 도덕적 단죄를 보여주면서, 습관적인 삶에 대해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빛을 보게 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작가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인간의 삶에 따뜻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득 톨스토이가 죽기 며칠 전 딸 알렉산드리아에게 받아쓰게 한 “사람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 사람답게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