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걷히며 마을 전경 한눈에
현대식 숙소·부지런한 농부 보여
계단식 논밭 푸른 푸성귀들 싱싱
깊은 산중서 자란 사탕수수 눈길

네팔에 도착한 이후 단 세 시간 이상 연이어 자본 적이 없다. 새벽을 맞이하기까지 두세 번씩은 잠에서 깬다. 몸은 피곤한데 깊은 잠에 빠지지 않는다.

간드록에서의 지난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지금껏 살아오며 어제만큼 피곤한 날이 없었을 터인데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났다. 토막잠 끝에 눈을 뜨니 사방이 깜깜하고 조용하다. 세상에 모든 움직임이 사라진 듯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집이면 불을 켜고 책이라도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겠지만 간드록에서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아예 전기를 끊어버린다. 일어나 부스럭거릴 수도 없고 겨우 잠든 친구들을 깨울까 신경이 쓰여 꼼짝 않고 있으려니 감옥살이나 다름없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있었는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화장실을 가는 척 밖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나서자 온몸에 냉기가 감돈다. 기온이 뚝 떨어진 듯하다.

밖은 날이 새고 있었다. 아직도 간드록 마을은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7천m가 넘는 안나푸르나 남봉은 하얀 머리를 드러낸 채 거무스름한 하늘을 뚫고 치솟아 있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해 생각지도 못했는데 불현듯 일출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등성이로 올라갔다. 해돋이를 보겠다며 친구도 따라나섰다. 집들과 집들 사이로 난 가파른 계단을 20여분쯤 오르자 앞이 환하게 터지며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올라가니 포토라인이 있고, ‘지금 당신은 안나푸르나 남봉, 히운출리, 마차푸차레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습니다’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그러나 아직은 새벽 어스름이라 산과 하늘의 윤곽이 선명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다른 지역을 가면 방향구분이 어렵다.

나침반을 가져왔지만 숙소의 배낭에서 꺼내오지 않았다.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면 방향·높이·해의 위치까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지만 나는 아직도 구시대 유물인 나침반을 가지고 다닌다. 스마트폰이 없기도 하지만, 0.00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주는 전자기기보다 조금은 모자란 듯한 나침반의 투박함이 더 친근해서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든 것을 몸을 움직여야 해결할 수 있는 깊은 산중에 들고 보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을 때가 많다. 당장 생존에 필요한 먹고 걷는 것 이외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고 사치다.

차차로 어둠이 걷히며 간드록 마을의 아침 모습이 드러났다. 간드록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숙소들이 많다. 예전에 지어진 것들도 있지만 현대식으로 근래에 지어진 숙소들도 많이 보인다.

저런 숙소들을 짓기 위해 모든 자재들을 나귀나 사람들의 등짐으로 져 날랐을 것을 생각하니 숙연해지기까지 하다.

문득 어제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만났던 철근 맨 청년이 떠올랐다. 현지 주민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의 등에 원뿔 모양의 대바구니를 지고 있다. 밭에 거름을 내는 농부들이다. 어느 곳을 가나 농부들은 부지런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인데도 농부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한다. 생산의 가장 기저에 있는 사람들이 농부가 아닌가 한다. 그러고 보니 집들과 집들 사이에 풀밭인 줄 알았더니 온갖 채소들이 심어져 있다.

자세하게 살펴보니 밭에는 배추·유채·마늘처럼 눈에 익숙한 것들도 있고, 이제껏 보지 못한 과실나무와 농작물이 심어져 있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마다 만년설이 하얀데 계단식 논밭에는 푸른 푸성귀들이 싱싱하다. 더 신기한 것은 2천m가 넘는 이런 높은 지대에 사탕수수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사탕수수는 열대지방에만 있다고 생각하던 내게 네팔의 오지 중 오지인 깊은 산중에서도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인간이나 식물이나 어쩔 수 없이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인가 보다.

간드록 곳곳에 있는 숙소 발코니에 여행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들도 아마 일출을 기다리고 있는가보다. 그런데 해가 뜨지 않았는데도 하늘이 환하다. 보통의 일출이라면 하늘이 열리기 전 지평선 끝부터 붉은 빛이 감돌아야했다.

그런데 이곳의 하늘은 벌써부터 어둠이 걷혀 멀리 안나푸르나 산군들의 능선들이 확연하게 보이는데도 해는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흐려 해가 가려진 것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간드록 마을의 아침 정경은 손에 잡힐 듯 드러났다. 아쉽지만 일출 관망을 포기하고 포토라인에서 내려오는데 친구가 해가 뜬다고 한다.

뒤돌아보니 설산 끝에 매달린 주먹만한 붉은 기운이 보인다. 황급히 다시 포토라인으로 올라갔다. 산의 높이에 따라 안나푸르나 남봉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순으로 붉어진다. 붉은 빛은 산꼭대기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설산들의 속살을 구석구석 비췄다. 햇살이 비친 봉우리들이 마치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만년설에 비친 황금빛 햇살이 황홀하다.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꽃봉우리다. 만개하는 봉우리들을 숨을 죽여 바라보았다. 마음만 바빠 정신없이 셔터만 마구 눌렀다. 꽃봉우리들의 향연은 10여분 만에 끝이 났다.

그런데 숙소로 내려오는 길에 친구가 고통스러워 했다.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무릎이 아프다며 신음소리를 냈다. 숙소로 돌아온 친구가 산행을 포기해야겠다며 우리 둘만 다녀오라고 한다.

많이 힘들기도 했겠지만 혹시라도 더 진행했다가 중간에서 심각해지면 우리에게 짐이 될까 그러는 것 같았다. 예기치 못했던 일에 적이 당황했다. 정말로 벼르고 별러 오게 된 네팔,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인데 한편으로는 아쉽기만 했다. 나도 마음을 접을 수밖에.

무엇보다도 여행은 안전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무리하게 진행하다 사고라도 나면 아니함만 못하다. 예전에 젊은 시절 보았던 ‘K2, 죽음을 부르는 산’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목숨을 걸고 도전한 K2에서 정상이 코앞인데 악천후로 마음을 접고 돌아서는 산악인의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도 나는 보여주기 위한 산행이 많았다. 지리산을 10여 차례 종주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걸었고, 어디를 갔다 왔다는 식으로 얘기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적은 자신의 욕심이다’는 것을, 난 그때 그 산악인을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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