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아침 해가 떠오르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간에 인천 공항으로 출발하는 해외답사 일행들은 제시간들을 지켜 집결지로 모였다.

그들의 얼굴에선 먼 길 떠나는 호기심과 설렘으로 지난밤 설친 잠들은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여행은 지친 삶의 한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 놓고 잠시 반음을 쉬는 그런 시간들이다. 그 반음의 쉼을 맛보려 어느 날 일상의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문밖을 나선다.

중국 서안서 출발한 칭장 열차 속에서 보는 티베트 고원들과 설산은 해발 5천m의 고산 속에서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오직 그들이 믿는 신에게 경외하는 마음과 기원은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질 문명의 안온한 삶을 살았던 티베트 밖의 치외법권자들이 그들의 땅을 방문 한다는 것을 호락호락 허락할리라고는 예상치 않았지만, 일행들은 지독한 고산증상으로 여기저기서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다.

지리적 특성상 세계 지붕 속 고산의 티베트는 오지속의 오지인 고립무원의 땅이다. 그래서 훼손 없이 수세기 동안 그들 특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왔는지도 모른다. 풀 한포기가 제대로 나지 않는 고산은 검붉은 색들로 이방의 풍광을 차창 밖에서 비춰 줄뿐이다.

당태종의 딸인 문성 공주가 정략적으로 티베트 왕과 결혼을 하면서 가져 왔다는 불경이 이 나라의 토착 신앙과 만나 독특한 라마교라는 불교 왕국을 융성시켰다.

중국이 험한 고산의 위험한 공사를 감행 한 것은 티베트를 완전 장악하기 위한 대철도 공사였다는 것이 씁쓰름할 따름이다. 일제강점기때 한반도 철도 역사 또한 일본이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철도 공사였듯이 말이다.

차창 밖으로 간간이 펼쳐지는 마을들과 희미하게 보이는 양떼들 그리고 한가로운 야크들은 티베트가 저 척박을 등에 업고서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눈에는 아름다움과 경탄만이 있을 뿐이다.

가진 것들이 흔하고 넘쳐 나서 정작 고마워 해보지 못한 문명의 세월들이 죽비로 내 뒤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땔감으로 훌륭한 연료가 된다는 야크 똥을 우리네 개떡처럼 동그랗고 납작하게 빚어 탑처럼 쌓아 놓던가, 아니면 담벼락에 여지없이 기하학 문양으로 붙여져 있는 모양들이 설치 미술품처럼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냄새나고 더러워 피하기만 하는 짐승의 똥도 저렇게 아름답게 재창조된 예술품이 된다는 것을 티베트 들판 집들의 담장과 옥상에서 다시 발견한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지혜롭게 재창조하고 이용해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엿보며 어떤 것이 미개하고 선진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오만과 편견이 여지없이 1t 해머로 깨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는 이제 티베트인들의 도시가 아니라, 어느 중국의 한 도시처럼 티베트의 고유의 색은 다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거리에 세워 졌다. 대대로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면서 티베트인들에게 정신적 지주 노릇을 했던 제정일치의 산실인 포탈라궁은 주인을 잃은 채, 중국 공안들이 삼엄하게 검문검색을 하며 지키는 쇄락한 궁으로 전락되었다.

중국 한인들이 점령한 라사는 더 이상 세상의 오지 속 이상향이 아닌 최신식 건물들 속에서 60년이라는 중국의 강제점령의 시간만이 웅크리고 있다.

평균 고도가 4천m 이상인 도시들을 거쳐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초모랑마다. 티베트어로 에베레스트 설산을 그리 부른다 한다. 대지의 여신, 세상의 어머니인 초모랑마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은 너무도 멀고 험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