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팔로 간다
사방이 산으로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자갈길
산비탈 마을 주민들 적응력 그저 놀라울 뿐
길은 생필품을 운반해주는 핏줄과 같은 것

점심을 먹고 난 이후 두 시간 넘게 계단으로 된 비탈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이런 지독한 계단은 난생 처음이다. 삼십여년 전인 1979년 여름, 처음 지리산을 갔을 때가 떠오른다. 조치원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도착한 구례역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새벽녘부터 오르기 시작한 노고단, 그때 코에 단내가 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래도 젊다는 패기 하나로 죽을힘을 다해 코재를 넘어 노고단에 올라섰었다. 그때는 스무 살 초반의 원기 왕성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초로기도 훨씬 넘긴 기울어가는 서산 해다. 그래도 이제껏 스무 살 청년처럼 생각하며 그런 기분으로 살아왔다. 내게 쌓여있는 연륜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마음만은 청춘이니까. 그러나 네팔에 와서 그런 자신감에 금이 생기기 시작한다. 한국과 네팔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음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을 네팔은 가지고 있다.

첫날부터 내 몸과 육체를 주눅 들게 만든 것은 비탈을 따라 놓인 돌계단길. 비탈의 돌계단은 마을과 마을, 산과 산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지리산 노고단 길 역시 코가 땅에 닿을 듯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기는 하지만 숲으로 난 호젓한 육산길이다.

간드록으로 가는 길은 고도부터 2천m에 육박했고 나무그늘은 아예 없고 길은 돌계단과 자갈길이다. 평지라고는 전혀 없다.

사방이 산이다. 그것도 이제까지 보아왔던 눈에 익은 순하고 나지막한 산이 아니라 시선을 막아서는 칼날같은 우뚝 솟은 고봉의 설산들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 안에 학교·가게·식당·숙박업소·농가 등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모든 것이 비탈에 붙어 있어서, 집도 마을도 농토도 소도 말도 사람들도 모두 비탈에 산다. 오전에 비레탄티에서 ABC 트레킹을 시작하며 ‘저런 곳에선 뭘 먹고 살까?’ 하고 걱정했던 그런 마을들이 산비탈에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열악한 땅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네팔인들과 인간의 적응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들이 이곳에 살 수 있는 것은 다른 마을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사람과 당나귀가 오가며 생필품을 운반한다. 여행객인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단순하게 힘겹다는 생각만 했지만, 그들에게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운반해주는 핏줄과도 같은 길이다.

나는 그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길에서 네팔 사람들의 실생활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제껏 살아온 나의 삶은 이들에 비하면 힘들다는 소리조차 사치였음을 느끼게 했다. 

마을의 집들과 집들 사이로 난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고, 비탈의 다랑이 논과 논 사이를 지나 산허리로 이어지는 돌계단 길을 그저 걷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난다.

콧속과 목구멍이 컬컬하다. 게다가 겨울임에도 내려쬐는 햇살이 얼마나 강렬한지 온몸은 땀범벅이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하다. 그만 주저앉아 퍼지고 싶은 갈등이 머릿속에 꽉차오를 즈음, 눈앞에 놀고 있는 네팔 소녀 네댓 명이 보였다.

서둘러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마음 뿐 발바닥에 닿는 거친 느낌과 무거운 다리는 소녀들이 있는 곳까지는 한참이나 더 걸은 후에나 당도할 수 있었다.

그곳은 쉼터 같은 곳이었다. 넓이는 열 평쯤 될까 경사지를 깎아 평탄하게 만들고, 그 위에 구들장 같은 넓적넓적한 돌을 깔아 여행객이나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잠시 숨을 돌리도록 만들어 놓았다.

빈 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이런 높은 곳까지 힘든 사람들을 위해 땅을 파고 돌을 져 날랐을 그 사람들을 생각하니 고마움을 넘어 경애심이 느껴진다.

나는 배낭부터 벗어 던지고 대자로 누웠다. 단지 걸음을 멈추고 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편안할 수 없다. 행복이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그마한 것에서 느끼는 행복, 이것이 참 행복은 아닐까. 한참을 이렇게 누워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높게만 보이던 산들도 많이 낮아졌다. 네팔 소녀들은 나무를 해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 것 같았다.

호기심에 소녀들이 내려놓은 나뭇짐을 들어보았다.

나무라고 우습게 생각했더니 묵직한 느낌이 두 팔로 전해지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는다. 동행하던 친구가 다시 들어보려고 했지만 역시 들리지 않는다. 소녀들이 일시에 ‘까르르’ 거리며 웃는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은 명랑하다.

네팔 소녀들에게 견본화장품을 나눠주고 설명을 했더니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고는 좋아한다. 그곳에서 소녀들과 한참을 통하지 않는 말로 제각각 수다를 떨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떼와 자신의 몸집보다 두어 배는 됨직한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지나간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힘들어하는 표정은 볼 수 없다. 주어진 환경을 그저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 사이에 철근을 메고 오는 네팔 청년을 만났는데, 처음 보는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런 험한 산길을 사람의 힘만으로 철근을 어깨에 메고 운반하다니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더구나 그 청년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복숭아 뼈 밑으로 심한 상처가 보인다. 친구가 발을 씻고 오라고 했다. 씻고 온 청년의 발 상태를 보니 상처는 훨씬 더 심각했다.

복숭아 뼈 밑이 파여 붉은 살과 허연 뼈까지 드러나 보인다. 우리는 등산화를 신고도 바위에 부딪치거나 돌부리에 채이면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데 청년은 슬리퍼를 신은 채 무거운 철근을 메고 험한 산길을 오르내렸을 터이니 그 발이 온전할 리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상처가 나도 병원은 고사하고 약조차 구하기 어려우니 치료조차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안타까운 생각에 가지고 간 약을 발라주고 약을 주면서 깨끗하게 씻은 다음 바를 것을 알려주었다. 청년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확연하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고마움의 표현이리라. 돈이 넉넉하면 바르는 약이라도 여러 개 사와 하나씩 나눠주고 싶다. 소녀들은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며 재잘거린다.

소녀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내가 들지도 못했던 나뭇짐을 소녀들은 가볍게 메고 산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손을 흔든다.

우리 일행은 청년을 따라 간드록으로 향했다. 맨발에, 슬리퍼에, 상처를 입은 발에, 무거운 철근을 메고도 청년은 우리보다 앞서서 거친 비탈길을 잘도 올라간다. 그리고 불과 얼마 걷지 않아 그 청년은 산모퉁이로 사라졌다.

역시 8천m 급의 산들은 상상을 불허했다. ‘좁쌀 백번 구르면 뭐하냐. 호박 한 번 구르니만 못한 걸!’이라던 후배의 말이 생각난다. 고봉들의 품은 높이만큼이나 넓다. 이제는 좀 모습을 보여주려나, 하는 희망을 품고 죽을힘을 다해 산허리를 돌고나면 또 몇 겹의 준령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건 트레킹이 아니라 인간의 극한을 시험하는 생존훈련 같다. 온몸에 힘이 빠져 걷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쯤 티가람이 ‘간드록’이라며 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내 눈앞에 직벽처럼 보이는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계단 끝에 지붕과 함께 ‘간드록’을 알리는 네팔어와 영문이 보인다.

오늘 묵어야 할 숙소에 도착하려면 코재같은 저 가파른 계단을 또 올라가야 한다. ‘간드록’이라는 티가람의 말에 생겼던 희망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뀐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쭈욱 빠진다. 그리고 짜증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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