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유월의 달력을 마주 칠 때마다, 같은 형제 민족들이 가슴에다 흉포한 총칼을 들이대고 명분도 없이 죽고 죽이는 처참했던 광경만이 내 머릿속엔 맨 처음 떠오르는 붉은 기억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할 슬픔의 기억과 비탄 속 세월의 절벽을 간접으로나마 서늘하게 느끼는 날들이다.

담장 위 붉은 장미도 햇살에 제빛을 발하지 못하고 시름거리는 날, 먹장구름 가득 몰고와 정수리에다 대고 천둥과 번개로 내리치는 소식을 접한다.

철원 최전방으로 군대를 가 제대를 한 달여 남겨 놓은 아들 녀석이 신입 후임들과 불협화음으로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분대장이라는 직함을 한 달 전 받은 아들 녀석과 상담 상병이라는 아이,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나고 자라서, 굳이 우리나라의 군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됐던 아이까지 선임 세 명이 송사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사건의 연유야 어찌 됐건 간에 그 소식을 접한 부모들은 선임, 후임 따질 것 없이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고 또한 군대라는 특수한 곳에서 일어난 일이니, 후방의 부모들은 파악이 쉽사리 되지 않아 애간장만 타 들어가는 상황이다.

밤새 뜬눈으로 보내고 이것 저것 아들 녀석이 평소 좋아했던 음식들을 챙겨 날이 밝아 오는 새벽에 서둘러 부부가 길을 나선다.

온갖 생각들로 차안은 묵직한 침묵만 가득 찬다.

대한민국 건장한 사내들이라면 군대라는 곳은 누구나가 다 갔다 온 곳이고, 또한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들이 군대 병영시절 이야기라고 하지 않은가!

야생마 같은 길들여지지 않은 시퍼런 피 끓는 청춘들을 어느 날 군대라는 울타리에 몰아 놓고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기보다는 군대 조직이라는 틀 속에서 규격화를 만든다는 것이 어찌 쉽기만 하겠는가!

군단 헌병대서 만난 아들은 며칠 동안 마음고생을 무척 했는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해쓱하다. 너무 걱정 말라는 내 다독거림에 종당엔 눈물을 줄줄 흘린다.

어린 시절 녀석은 병약해 병원의 처방약을 밥 먹듯 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참 많은 아이였다.

유치원 여섯살 시절에는 재롱잔치의 연극 ‘빨간 모자’속 배역들을 정하는데 있어서 악역의 늑대를 맡은 한아이가 나쁜 이미지의 늑대 때문인지 울면서 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난감해진 유치원 선생이 다시 늑대 배역을 정하기 위해 신청을 받았지만, 누구도 나쁜 늑대배역을 하려 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손을 그 순간 번쩍 들고 자기가 한다고 했단다.

녀석은 호기심 많고 세상에 편견이 없었다.

그리곤 빠진 앞니 입을 오물거리며 배역 중에 가장 많은 대사를 훌륭히 다 소화해 연기를 했다.

폭발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세 명의 청춘이 지금 반성이라는 동굴 속에서 근신을 하고 있다.

질풍노도 속의 청춘들은 그 젊음 자체로도 눈이 부시지만, 또한 그만큼 그 에너지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위험한 존재들이다.

해외 인도네시아의 아버지는 속만 애태우고 있을 것이니, 그 몫까지 안고 이 난관을 잘 헤쳐 나가자고 두 아버지는 서로를 위로한다.

속수무책이었던 두 아버지들이 상대들에게 막막한 마음을 의지해 한시름 놓는다.

아들의 아버지들 그들의 공통점은 청춘의 한 시절을 병영이라는 곳에서 피땀 흘리며 함께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유대감으로 작용 한 듯하다.

인도네시아 아버지는 애국심이 대단한 분이다.

아들을 본국 군대까지 보냈지 않았는가! 때 이른 무더위 속 내리 꽂히는 햇살아래 두 아버지들은 십년은 더 늙은 표정들이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침착해 보인다.

아버지의 큰 그늘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정작 자식이 가장 위급하고 천지간 혼자라고 무서워 떨고 있을 때, 말없이 덥석 아들의 손을 잡아 주는 존재로서 말이다.

붉은 유월 초입에 일어난 이 불상사를 계기로 세 청춘들은 반성의 시간과 함께 또 다른 성장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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