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사인 산수유 노란 꽃이 아파트 화단에서 여리게 빛을 발하던 날, 겨우내 무겁던 마음을 뒤로 하고 봄으로 출렁대고 있는 남도의 땅을 향해 집을 나선다.

암갈색 찬연하던 겨울을 벗는 들녘을 지나면서 내 눈빛은 아련해 진다.

뭇 생명들도 때를 알고 저리 다시 봄의 기운을 듬뿍 담고 시간이라는 굴레 속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

그들의 장한 모습에서 내존재라는 것은 너무도 하찮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순환의 고리에 나 또한 자연의 극히 미미한 일부분 일뿐인 것이다.

차창 밖 낮은 산들이 점점 뒤로 사라지며 너른 들판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남도의 땅에 가까워지고 있다.

꽃이 얼마나 예쁘면 날씨까지도 시샘을 할까! 꽃샘추위는 겨울 날씨처럼 쌀쌀해서 덧옷을 단단히 껴입고 차에서 내렸다.

신라 말 풍수지리에 능통 했다는 스님 도선이 하루에 걸쳐 세웠다는 천불 천탑의 화순 운주사에는 평일이라서 그런지 주차장이 한산하다.

간간이 피어 있는 매화꽃들만이 방문객을 수줍게 맞이한다.

일주문을 지나 바람 속을 통과하며 자박자박 걷다가 한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내 입가에선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저리 천진한 모습의 부처들도 있을까! 차라리 설빗한 봄빛에 기대어 동네 담벼락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깨묵쟁이 화동들 같다.

서 있는 돌부처들이 큰 바위아래 줄지어 있는 모습들이 소박하고 정겨워 으레 사찰들의 불상에서 느꼈던 위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동글 거리는 얼굴에 비대칭적으로 큰 코와 인중이 더욱 인간적인 친밀감을 준다.

어린 날 부모님들이 장에 가 해거름 녘까지 오시지 않으면 동생들을 앞세워 동구 밖 선바위 아래 기대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 끝을 눈이 시리게 바라보곤 했었다.

저 부처들이 꼭 어린동생들과 내 모습 같기도 하다.

친근한 돌부처들의 반가운 환영을 뒤로 하고 걷다보니 원형의 석탑과 앞뒤로 앉아 있는 돌부처들을 만난다.

특이한 양식의 부처들로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모양들이다.

대개의 사찰들이 깊은 산속 계곡을 따라 요사 채들이 있기 마련인데 운주사는 산이라고 칭하기도 미안 할 정도로 야트막한 구릉 속 실개천을 따라 조성 된 것이 참으로 오묘하다.

또 깊지도 않은 그 산속에서 건기의 봄인데도 물이 풍부하게 흐르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도선은 돌부처와 돌탑을 세우며 어떤 이상국을 염원했을까!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예로부터 내 노라 하는 시인과 묵객들이 잦은 발걸음을 왜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쌀쌀했던 날씨 속도 걷다 보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언 듯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불사 바위로 향한다.

새의 눈으로 불사 바위에서 바라보니 발아래 운주사 천불 천탑과 사찰의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 또한 그 옛날 운주사 건축현장을 진두지휘했을 도선이 되어 본다.

바람이 좀 전보다 더 거세져 새의 가슴인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둘러 바위를 내려온다.

건너편 산등성이에 누워 있는 한 쌍의 불상은 첫 닭이 우는 바람에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설화가 있다.

도선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꿈꾼 미륵세계의 이상향은 지금 우리가 꿈꾸는 세계와도 참으로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정채봉 작가는 어느 날 그 와불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가 엄마라는 따듯한 말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나 또한 꽃샘추위 속 따듯한 차 한잔을 든든하게 대접받은 것처럼, 알 수 없는 기쁨에 휩싸여 뒤돌아서는 남도 여행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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