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문화재단 설립해
문화예술체험캠프 등 개최
운영 미숙한 이사진
모든 행사 사장시켜

운보는 동물들을 유달리 좋아했다.

운보는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평상의 삶 속에서는 장애로 인한 많은 무시와 배신 등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으며 살아 왔다.

그런 이유 때문에 ‘동물들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한가지 믿음으로 동물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주었으며 집에서 키우던 동물들이 죽으면 먹지 못하게 하고 꼭 묻어 주도록 당부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필자가 하던 일 중의 하나는 가축들이 죽었을 때 먹는지 묻어 주는지 감독을 하는 일도 있었다.

운보의집에는 사슴을 비롯한 칠면조, 오골계, 토끼, 금계, 은계, 꿩, 공작, 닭 등이 있었는데 운보는 가끔 그것들을 스케치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특히 개들을 좋아해서 운보는 아침마다 집안의 개들을 돌아가며 쓰다듬어 주었다.

1993년 운향미술관에서 대표작 15점을 도난당했을 때도 이를 알게 된 운보는 “왜 그래! 그림만 가져가지 개를 왜 죽여, 나쁜 놈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다고, 천벌이나 받으라고 해!”라며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쥐고 허공에 수차례 원을 그렸다.

아끼는 대표작들보다 개를 잃은 것을 더욱 아파하면서 울먹였는데 이들은 개의 목을 자르고 혀를 뽑아서 걸어 놓고 갔던 것이다. 그 외에도 필자는 운보를 10여년간 모시며 운보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걸 두세 번 보았다.

운보는 청주에 내려 온 후 운보의집 안채 정자에 앉아서도 볼 수 있도록 뒷산 중턱에 부인의 묘를 이장해 놓고 살았는데 한번은 홀로 정자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다 말고 멍하니 있는 것을 보았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지붕 너머에 있는 부인 우향의 산소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우향, 조금만 기다려. 나도 곧 갈 거야…”라고 독백하는 소리에 슬쩍 훔쳐보니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또 명절이 돼 차례를 모실 때였는데 할머니, 어머니, 우향의 사진을 쓰다듬으면서 나지막하고 어눌한 말투로 “이 분들이 귀먹은 꼬맹이를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준 분들이야”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모두 1993년의 일이다.

일생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는 무시와 마음의 상처를 받은 반면에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운보의 사회복지사업과 운보의집에 대해 관심을 주기도 했다.

현재 운보미술관 옆으로 사슴들이 있는데 필자가 처음 운보의집에 왔던 1989년에는 안채 대문 앞에 사슴장이 있었다.

사슴은 운보가 사회복지사업에 열중이었던 전두환 前대통령 시절에 영부인 이순자 여사와 동생 전경환씨가 서울의 복지회관에는 청음버스를 마련해 주고, 운보의집을 방문하면서 어린 사슴 한 쌍을 선물로 가져 왔다고 한다.

이것들이 번식하자 뛰어 놀 수 있도록 사슴장을 만들어 줬는데 이것이 손님들에게는 좋은 볼거리가 됐다.

운보의집에는 많은 지인들이 찾아왔었는데 그중에 고인이 되신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생각난다.

손기정 옹은 1년에 한 번씩 운보의집에 들렀으며 한번은 황영조 선수를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

두 분은 무슨 사연이 있는지 만날 때 마다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기에 주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함께 숙연해 지곤 했었다. 그 외에도 쌍용의 김석원 회장, 박찬종 국회의원 등도 기억나며 청주공단에 있는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의 한광호 회장은 문화, 예술에 관심과 조예가 있어 후에 한빛 문화재단과 화정박물관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한 회장 부부는 서울과 청주에서 운보와 자주 만나 식사를 하거나 서울 한회장의 자택으로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내기도 했다.

필자는 운보를 모실 때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장애인 복지기금 마련을 위해 연주를 하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씨를 처음 만나 인사드린 적이 있다.

운보의 사후인 2002년에 공연차 청주에 내려온 정경화씨는 필자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와 운보의집을 둘러보았다.

추억을 더듬던 정경화씨는 “살아 계실 때 한 번 더 왔었어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또 “운보선생님은 소리를 듣지도 못하는데 연주회에 왔을 때 보면 마치 연주를 듣는 사람 같아 놀랐었다”며 지나간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1990년을 전후해 운보어린이사생대회가 만들어졌다.

내 기억으로는 후일에 청원군 의장을 지낸 변장섭씨가 당시 운보를 찾아와서 계획을 말씀드리고 운보와 함께 시작 한 행사였다.

처음엔 내수의 변장섭, 유재평씨가 주축이 됐고 이후 청원JC에서 매년 이어갔던 행사로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의 작품을 마당에 넓게 깔아 놓고 하나하나 직접 심사를 하던 운보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린이미술대회 외에도 필자는 청원, 청주청년회의소 회원들에게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들은 적적해 하는 운보에게 가끔씩 찾아와 JC회원이 운영하는 식당에 모시고 가서 메뉴에도 없는 음식들을 운보의 식성대로 준비해 내 놓기도 했으며 운보가 타계했을 때는 칼바람과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던 악천후였음에도 명동성당에서 내려온 운구를 위해 초입부터 험한 산중턱까지 모시면서 장례절차까지 도맡아 준 고마움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운보문화재단 설립

운보가 병석에 눕게 되자 아들 김완 회장은 부친 사후의 운보의집 운영을 걱정하게 됐다.

이에 재산상속을 포기하고 부친과 상의해 부친 생전에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증해 공익재단법인을 만들기로 했다.

안채와 미술관 등 중요한 부분은 공익재단으로 보존하면서 운보공방의 사업수익 일부를 재단 운영비로 보조 지원하는 체제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공방을 포함한 운보의집 일부를 매도했는데 이것이 주식회사 ‘운보와 사람들’이 됐다.

운보문화재단의 발기인들은 문화관광부에 김완을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해 승인받고자 했으나 유족이 이사장을 할 경우 거액의 상속세를 내야 했다.

그러나 세금에 대한 생각 없이 운보의 모든 재산을 이미 재단법인에 기증한 상태였으므로 김완은 이사장직을 포기하고 황급히 이사장을 물색했으며 처음 만난 백모씨를 이사장으로 한 운보문화재단이 2001년 3월에 설립 되었다.

운보문화재단은 초기부터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설립 된 해부터 5박 6일의 운보문화예술체험여름캠프를 매년 개최 하였고 재단의 활성화를 위해 전국의 장애인작가들과 교류했으며 운보의 제자들과 미술대학장들이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전시 등도 수차례 개최했다.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와 연계한 전시를 유치하기도 했으며 2002년부터는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대상(大賞)으로 한 운보전국학생미술대회를 만들어 매년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재단 이사장의 파행이 문제가 되면서 이런 활동들도 멈추고 2007년 3월에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 됐으나 이들은 재단운영에 더욱 미숙한 무능함을 보였고, 그나마 초대 이사진이 진행해 왔던 행사들조차 모두 사장시키면서 임기가 끝나고 있다.

그러나 설립취지와 맞는 노력조차 두드러지게 보이지 못한 이사진이 과실에 책임지는 모습보다는 자리에 연연하며 다시 재임하려는 파렴치한 모습만을 보여 줄 것 같아 씁쓸함보다 걱정이 앞선다.

운보의 생일은 2월 18일(양력 3월 29일)로 금번 금요일이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청주에 내려 온 후 청주를 제2의 고향이라 했던 운보 김기창.

외부손님들을 초정으로, 산성으로, 청주시내로 안내하며 곳곳을 소개하고 자랑하던 운보.

그러나 그의 예술혼이나 삶의 흔적들이 깃든 운보의집도, 제2의 고향인 청주도 너무 조용하고 쓸쓸해 안타깝기만 하다.

정자에서 우두커니 부인의 묘를 보며 쓸쓸히 독백하던, 운보의 처연한 모습과 눈빛이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다.

운보의 집이 지역의 명소인 문화공간으로 다시 한 번 거듭나게 되기를 바라며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드려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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