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람미술관 최초 전관 전시
운보 팔순기념 대회고전 오픈
북한 평양조선미술박물관에
작품 32점 소장·운보실 운영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서 쓰러져
헤어진 동생 김기만씨와 병실서 상봉

운보의 화풍은 수도 없이 바뀌는데 다양한 화풍의 시도 자체보다는 다양한 화풍 안에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행보이다. 항시 습관처럼 “노력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다”고 했는데 아마 당신의 지나온 과정을 말씀 하셨던 것 같다. 운보의 이런 노력과 창작 욕구는 운보가 70대가 된 후에도 변화를 추구하며 열정적인 작품을 제작했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운보는 운보의집을 완공한 1984년(1984~1989년)에 71세의 나이로 바보, 청록, 문자도 등을 그리는 화풍에 접어들었고, 점·선을 주제로 한 심상 시리즈(1989~1992년)를 거쳐 마지막인 종합화 시기(1992~)로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고 한다.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으로 운보의 봉걸레 작업인 ‘걸레수묵’ 심상시리즈를 발표하는 ‘운보전’을 개최했다.

필자는 미술대학원생 7~8명을 데리고 이 전시가 끝날 때까지 진행을 맡게 됐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운보 화백을 24시간 모시며 숙식을 함께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또 운보의 아들 김완은 필자의 결혼식 주례를 서 줬고, 고인이 되신 필자의 부친을 대신해 운보는 폐백을 받아줬다.

운보의 타계 당시 서울의 ‘ㅅ’의료원에서는 유족이 운보를 모셨고 운보의집 분향소에서는 필자가 제자 두 분과 함께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또 운보의 사후에는 운보문화재단의 사무국장과 운보미술관의 관장까지 이어지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렇게 운보를 만나면서 나의 인생은 지금까지 흘러 왔으며 지금도 운보의 영향으로 장애인 예술에 관심을 두고 그 길을 가고 있으니 참으로 운명이란 묘한 것 같다.

운보를 모시기 시작한 몇 년 후 1993년에 서울 예술의전당이 주관 개최한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은 한가람미술관 최초로 단체가 아닌 개인에게 전시장을 오픈했다.

한 작가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관 3천여평에 1천200여점의 작품을 전시한 전무후무한 대 전시였으며 1일 1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가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을 준비 중이었는데 API 대표 김중돈은 이를 위해 해외 국가와 북한까지 가서 작품을 촬영 하였다.

놀라운 것은 북한의 평양조선미술박물관에 운보의 1930~40년대의 작품 32점이 소장돼 있다는 것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운보실’이 따로 있어 그동안 운보의 작품을 상설전시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1993년은 남한의 일부 국문학자나 미술사학자들이 운보를 친일작가라 소리높일 때였으므로, 정통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친일파들을 모조리 정리했다는 북한에서 운보를 특별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에 필자는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김일성의 지시로 개관된 북한의 대표적 미술관이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주제로 표현한 작품들이 대부분인 이곳에 특별히 ‘운보실’이 있다는 것에 맘 놓고 자랑하기도 어려워 우리는 “이젠 빨갱이로 몰릴 차례”라는 농담들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 전시에는 구상 시인의 축사와 김종필 최고위원의 인사말을 비롯해 영부인 손명순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참석해 축하해 줬으며 충북지역에서는 문화시장으로 유명한 나기정 청주시장이 서울까지 와서 축하해 줬다. 1995년 82세의 나이로 롯데화랑 부산점 개관식에서 작품시연을 보이며 노익장임을 과시하기도 했던 운보는 이듬해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996년은 후소회 창립 60주년이었다.

요양 중이던 운보는 필자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소회는 나를 만들어준 이당 선생님과 연관 된 것이고, 사모님도 오신다는데 내가 안가면 죽어서도 이당 선생님을 뵐 수 없다”며 무리하게 기념행사에 참석했고 인사말을 하는 도중에 쓰러졌다. 이틀 후 응급실에서 의식은 돌아 왔지만 입원실로 옮겨 투병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투병 중이던 1999년에 앙드레 김과 관련 된 옷 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여파로 신동아 그룹의 최순영 회장이 정·관계 로비목적으로 운보의 그림을 다량 사들였다는 오해가 있었으나 검찰은 조사 결과 `운보 그림 로비’ 의혹이 한마디로 `실체 없는 해프닝’이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운보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이 일과 무관했지만 갑자기 이미지에 타격을 받았고 미술계 역시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최순영의 부인인 이형자는 운보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한 사람으로 필자는 사건이 있기 오래 전에도 운보의집에 찾아오거나 서울에서 만나 식사를 함께 하던 이형자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소곳하고 조용한 이미지로 신사임당을 연상케 했던 이형자씨는 63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동양미술관(가칭) 건립을 준비했는데 평소에도 운보와 고암 등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도 수집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운보 사후에도 운보의 작품이 보존되기를 원했던 운보의 아들과 역시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형자가 운보의 작품을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추진한 일이었다.

당시 뉴스를 보며 내막을 알고 있던 필자는 언론의 오보와 사람들의 오해에 가슴이 아팠었다.

몇 년이 지난 운보 사후에 ‘리움’에서 열린 전국박물관장 신년모임에서 앙드레 김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앙드레 김은 “그 때 운보 선생님이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라며 타계를 아쉬워했고 아들, 며느리 등의 근황도 궁금해 하며 안부를 전해 달라했다.

운보는 2001년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는데 건강할 때 늘 보고 싶어 하던 동생을 2000년 남북 2차 상봉으로 병원 침상에서 만나게 됐다.

6·25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동생들 중 월북화가 김기만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당시 중환자실에서 운보가 누워 있던 침대를 그대로 밀어서 상봉을 위해 마련한 병실로 갔는데 한참 후 사진에서 본 동생이 앞뒤에 네 명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들어 왔다.

한마디 말도 못 했지만 동생을 잡은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고 동생과 눈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서럽게 대성통곡을 하던 동생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운보의집을 완공하기 전인 1984년에 운보의집 입주식을 미리 했다.

칠순의 나이로 쓴 이 때의 글이 천진한 것 같아 소개 해 본다.

“1983년 12월 8일. 청주 입주식. 김우현 목사님 모시고 떠났다. 청명한 날씨 먼저 유치원 낙성식을 했다. 교인과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부도지사와 군수, 신문사장, MBC 책임자 등도 왔다. 유치원 이름은 새마을 육아원이라고 했고 식이 끝난 후 우리 집으로 갔다. 나의 입주식 때 찬송가 부르는데 지붕위로 무지개가 떴다.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된 자로 뽑힘을 느꼈으며 앞으로 몸가짐에 조심해야겠다. 할렐루야 아멘!”

운보의집은 형동 2리에 자리 잡았으며 운보는 형동 1리에는 교회를 지어 목사의 월급도 지원했다.

운보는 기독교인이었으나 1985년 개종했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영세를 받았고 사후에 가는 길도 명동 성당에서 김 추기경의 미사로 진행됐다.

막내딸이 수녀가 된 후에 개종해도 되는지를 묻는 운보에게 당시 김우현 목사는 “하나님은 하나이니 무엇을 믿더라도 상관없다”는 말을 해줘 운보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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