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이 야금야금 베란다를 넘어 오더니 거실을 점령해간다. 한나절 소파에 누워 해찰을 떨다가 서둘러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다. 동백꽃도 붉은 볼을 봄볕에 부비며 아양을 떤다. 봄이 익어간다. 군자란도 꽃대를 밀어 올리느라 온 종일 분주하다. 수런거리는 화단을 서성이며 머지않아 집안을 분홍빛으로 물들일 아젤리아를 쓰다듬는다.

그런데 수상하다. 꽃망울이 맺혀야할 가지 끝에 연둣빛 잎이 제법 돋았다. 꽃이 피었다 지고 나야 잎이 나는 법인데 잎부터 밀어 올린다. 올해는 꽃을 피우지 않겠다는 반란처럼 보인다. 서운하다. 봄에 피는 그 화려한 꽃무리를 보려고 한해를 기다렸는데 올해는 눈감고 지내라한다.

지난해에 잎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진장 피어 집안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이더니 피곤이 지나쳤을까. 올해는 쉬어가려나. 무엇에 토라진 것인지, 뭐가 서운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돌아서는 발길이 허전하다.

사는 일이 언제나 욕심으로 가득 차서, 한해 꽃을 내놓지 않는다고 마음의 눈꼬리가 올라가고 샐쭉해져 돌아선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는데 간절히 기다렸다는 이유만으로 내 것을 잃은 것처럼 서운해 한다.

새해가 되면서 올해는 꼭 아이들이 결혼을 하기를 바랐다. 여기저기서 혼삿말이 들어오고 마음 급해진 나는 아이들을 들볶는다. 정작 아이들은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조건이 괜찮은 자리는 나 혼자서만 아까워 동동거린다.

냉정하게 만나볼 생각이 없다는 말에 마치 큰 재산이라도 날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마음 식히려고 혼자서 차를 마시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대편 부모의 재력이 뭔 소용이 있다고, 원래 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탐을 냈을까. 바르고 정직하게 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가르치고 길렀으면서 속물 근성을 내가 먼저 드러냈으니 딱한 건 바로 나인 것을.

한 걸음 늦추고 생각하면 바른 길이 보이는 것을 왜 그리 안달을 했는지 모르겠다. 곧게 서서 흔들리지 않으려 하나 바람은 그냥 두지 않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가고, 아이들은 바른 길을 가려하나 에미가 먼저 밑둥을 흔들어 대는 꼴이 아닌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는데 나 혼자 마음의 태풍을 만들어 흔들어대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해쯤 꽃을 거른다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꽃나무가 아닌 것도 아닌데 공연히 심통이 나서 서운해 했나보다. 좋은 혼처 마다했다고 내 아이들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혼자서 안달을 하고 있으니 이 속물을 어찌하면 좋을까.

거센 추위를 건너와 때 놓치지 않고 제자리를 비추는 봄 햇살처럼 모든 것은 알아서 제자리를 찾는 것을, 안달할 필요도 속상해할 것도 없는 것을 공연히 없는 바람에 흔들리고 말았다.

사는 일은 언제나 바람의 강을 건너는 것이리. 거센 바람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평온의 물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모든 것은 한 번씩 흔들리며 가는 것이리. 헛꿈을 꾸고 욕심으로 마음에 분탕질을 하며 호되게 흔들리는 봄이다.

다시 화단에 나와 뒤로 돌려놓았던 아젤리아 화분을 앞으로 내준다. 제 때에 꽃피우지 못한 연유가 있으리라. 고루 양분을 챙겨주지 못한 내 잘못이 더 컸을 텐데 공연한 트집을 잡았나 보다. 묵묵히 기다리면 알아서 크고 알아서 꽃피우고 알아서 열매 맺을 것을 줄기를 잡아 틀어 매고 생장점을 자르고 된 비료를 줘가며 억지 분재를 만들어 놓고 보기 좋다하는 인간의 비틀어진 욕심이 나무에게는 거센 바람이 아닐까. 머리채 잡이 흔드는 폭풍은 잘 견디면서도 인간의 호된 욕심의 폭풍은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는 나무들. 공연한 바람을 만들어 주위를 흔들고 나를 흔들며 이 봄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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