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로 입문
6개월 만에 선전에서 첫 입선
27세에 선전 추천작가로 선정
대한민국 최초 부부전도 개최
전통 동양화에 입체 구성 시도
1년 만에 예수 생애 30장 완성

▲ 매<소장자 박준환>

▶구상화 시기

운보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순종황제의 어진 제작) 화백은 훗날 어머니와 함께 마당에 들어서는 17세 운보의 첫 느낌이 “상서로운 길조인 봉황새 한 마리가 성큼 성큼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운보는 이당의 문하로 입문한 후 기초를 다지기 위해 사군자 위주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했다.

그림을 배운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이당은 운보에게 제10회 선전(조선예술전람회)에 출품 하도록 했고 이를 계기로 어머니는 운포(雲圃)란 아호를 만들어 주었다.

운보는 첫 출품한 선전에서 ‘널뛰기’란 작품으로 입선하면서 18세의 나이로 화단에 데뷔했다.

운보의 어머니는 취재기자에게 “듣지 못하는 아이가 완전한 사람들과 같이 입선 되었으니 매우 기쁩니다. 아직 그림을 배운지도 얼마 안 되고 그다지 잘 그리지도 못 했을 텐데 입선 된 것은 요행인가 합니다. 부모 된 마음에는 참으로 기쁩니다만 불구로 자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합니다”며 고개를 숙여 버리고 더 말씀이 없으셨다. <동아일보>

어머니의 감격하는 눈물을 본 운보는 더욱 그림에 매진해 제11회 선전에서도 입선을 하게 되었다.

연이은 입선에 어머니는 기뻐하며 비싼 그림재료를 일본에 주문해 장만해 주었다.

운보는 신바람이 나서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렸으나 그해 10월 산후 부황으로 고생하시던 38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장남이었음에도 모든 것을 어머니께 의지해야만 했던 청각장애인 운보는 어머니의 갑작스런 별세로 인해 어린 동생들까지 부양해야할 처지가 되었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으로 날마다 어머니 산소에 가서 먼 산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앞일이 캄캄했지만 가난은 걱정과 슬픔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운보는 나날이 밀리는 집세와 생계를 위해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붓을 놓아야 할 처지가 된 운보의 사정을 알게 된 이당은 그림 10장을 속히 그려오라 하여 이당의 친구들에게 모두 팔아 주었고, 운보는 이 돈으로 밀린 집세와 몇 달동안의 생활을 해결했다.

이때부터 이당은 운보에게 스승이요, 아버지였으며 운보가 의지하던 어머니의 역할까지 담당해준 은인이 됐다. 운보는 타계할 때까지 스승의 은혜를 평생 못 갚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노년에 건강악화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에도 담당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와 새해에는 반드시 스승 이당의 집을 찾아 사모님께 인사를 드리곤 했다.

당시 비서였던 나는 걱정이 됐으나 운보 선생의 의지를 막을 방법이 없어 산소통과 산소호흡기를 사서 차에 싣고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의 도움으로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 운보는 그림을 끝까지, 죽을 때까지 그리는 것만이 어머니의 뜻이며 어머니께 효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동양화의 세계로 더욱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출품한 이후 1940년까지 연속 6회 입선, 4회 특선의 입상을 기록하며 27세 어린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독특한 것은 선전 추천작가가 되기 이전인 24세때 이미 운보는 화단에서의 위치가 확립되었는데, 연 6회의 입선을 했던 운보가 제16회 선전에 출품한 ‘고담(古談)’으로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운보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의 산소로 뛰어 가서 설움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며 날이 저물 때까지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신보는 ‘농아(聾啞) 이중고에 특선을 하여 모친 묘전에 달려가 특선 기쁨을 오열고유 嗚咽告由’라는 제목으로 “김기창군 금일의 영광과 성공은 자모 생전의 노력 소사”라며 “은사 이당 화백이 지극히 아끼고 지도해 준 소산”이라는 글을 올렸다. 

선전 입상작들인 운보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사실적인 묘사의 구상작품으로 일본화식 동양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가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도쿄)의 상야(우에노)미술학교에서 서구미술의 영향을 받은 신일본화풍의 채색화를 익혔으며 일본풍의 인물과 채색산수에 능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45년 8·15광복 후, 운보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호 운포(雲圃)에서 굴레를 벗고 운보(雲甫)로 바꿔서 사용했는데 이는 장애의 굴레와 일본화풍에서 벗어나겠다는 소망과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시점부터 운보는 동양화가 전통 방식에만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며 운보의 작품도 일본색을 탈피하고 자유로운 자기만의 새로운 필력과 구성을 하게 된다.

이후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자유신문(自由新聞)’사의 문화부 기자로 취직했으며 국립민족박물관(現국립중앙박물관)에 미술 부장으로 취임해 민속 공예품을 연구하면서 민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우향 박래현과의 만남

1943년의 제22회 선전에서 총독상을 받게 된 우향(당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3학년)은 선전 수상식을 위해 잠시 한국에 왔다.

소문으로만 듣던 운보를 노대가(老大家)로 알고 시간을 내어 인사를 드리고자 집으로 찾아 갔는데 젊은 청년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미술에 대해 논하며 자주 만나다가 3년 뒤인 1946년에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운보는 우향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으므로 결혼비용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이에 운보는 병풍을 한점 그려서 판 돈으로 결혼비용을 마련하고 우향은 병풍 한점을 이모에게 팔아 달라고 부탁해 국수를 차려냈다.

또 결혼식을 운보의 직장인 국립민족박물관에서 하고 웨딩마치 대신 운보의 아악부 선배가 아악을 연주해 주었기 때문에 결혼식 비용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결혼 후 더욱 열심히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몰입했고 1년 만에 화가로는 한국 최초의 부부전인 제1회 ‘운보-우향 부부전’을 개최해 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큰 딸이 태어나자 필담으로는 딸과의 대화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우향은 이때까지 말을 못하고 필담으로만 대화를 나누던 운보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이 났으나 우향은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구화 학습을 반복시켰다.

운보의 어머니는 운보에게 글을 깨우쳐 주었고 우향은 말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운보는 평소에도 자신의 인생을 3인의 여성이 만들어 준 것이라며 고마워했는데 이는 그의 외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부인 우향 박래현을 말함이다.

6·25가 발발하자 운보는 처가가 있는 군산의 시외로 피난해 창고를 개조한 토방에서 아들(완), 딸(현)과 함께 네 식구가 생활했다.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계를 이어 갔고 그림을 팔아 안정이 될 무렵에 초상화 그리는 것을 중단하고 집을 장만하였으며 이곳에서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구상하고 있던 새로운 동양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실적 묘사로 탄탄한 구성의 작품을 하던 운보는 전통 동양화의 탈피만이 보다 차원 높은 예술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1952년을 전후 사실적 평면 구성이었던 동양화에 입체적 구성을 시도함으로써 입체파의 선구가 된다.

동양화의 현대작업인 구멍가게, 복덕방, 노점상 시리즈 등과 같은 대범하고 간결한 절제의 표현으로 새로운 예술세계가 피난 중에 열리게 된 것이다.

또 군산에 살면서 두 번의 꿈을 꾸었는데 한 번은, 예수의 시체를 안고 지하의 무덤으로 내려갔다가 차마 놓고 올 수 없어서 다시 안아 들고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몹시 통곡을 하는 꿈으로 우향이 깨운 후에도 실제로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또 하나의 꿈은 그가 앉아 있던 방이 갑자기 황금색으로 찬란히 빛이 나기에 자세히 보니 커다란 예배당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놀라서 찬란한 금빛이 비치는 곳을 보니 웬 사람이 찬송가를 혼자 부르고 있었는데 그는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이었다. 그날부터 운보는 예수의 생애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1년 만에 30장을 완성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서울로 거처를 옮긴 운보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부부전을 개최했는데 이때의 작품전에는 전란 중에 그린 운보의 성화 30점과 새롭게 연구하고 실험을 했던 입체파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우향의 작품을 포함해 전시했다.

새로운 실험작들은 운보의 예상과 달리 멀리 전라도, 경상도 시골에서까지 많은 인파가 몰려왔으며 성화를 보려는 기독교인들로 연일 초만원을 이루며 ‘갓 쓴 예수’라는 전시회의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또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들이 성화 앞에서 합장을 하기도 했으며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재림하셨다며 기뻐했다.

/ 김형태 국제장애인문화교류 충북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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