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한가한 시간이다. 특별히 할 일이 없기에 TV를 틀었다.

어느 초라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오고 있었다. 두 분의 모습을 보며 허탈감과 분노가 인다.

삼남매를 잘 키우셨다는 할아버지, 장사를 해서 근근이 모아둔 몇 천 만원을 딸에게 빼앗기고 오고 갈 곳이 없는 할머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식들과 소식이 끊긴지 이미 오래란다. 그 자식을 키우며 두 분은 주고 또 주어도 주고만 싶었을 것이다. 오로지 자식들을 위한 희생도 희생이라 생각지 않고 애지중지 키웠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선 아무것도 아까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거다. 부모란 그런 것이다. 어떤 대가성을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부모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자식이 우선이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보다도 뒤로 물러선 부모에 대한 효를 보며 우린 어찌해야 할까?

이 두 분은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생보 대상자에서 제외 되고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처해 있는지 가슴 아픈 노릇이다.

부모를, 형제를 살해하는 양심은 또 어찌된 일인가 말이다, 요즈음 세상의 변화에 가슴이 시리다. 그렇다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옛것을 간직하고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며칠 전 장애인들을 위한 미사가 성당에서 집전되고 있었다. 몇몇 교우들과 함께 갔었는데 신부님의 강론말씀이 생각난다.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사회개혁가로 산업혁명론을 주장한 ‘아널드 토인비’ 그 분의 이야기 속에 ‘지구의 종말에 우주선을 타고 떠나게 된다면 첫 번째로 가져가고 싶은 게 한국의 효에 대한 문화를 가져가고 싶다.’ 했단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었다. 몇 대가 모여 한 집에 살면서 위, 아래를 구별할 줄 알게 되고, 어떤 것이 효 인지 저절로 몸에 배여 습관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대가족 제도의 자연스런 유산이었으리라. 전통적으로 이어져야 할 소중한 것들, 조상님들의 지혜로움 마저도 가리어져 옛것은 뒤로 물러나게 되고, 핵가족화로 세상은 그동안 참으로 많이 변해왔다.

장유유서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는 신부님 말씀이 떠오른다. 정말 맞는 말씀이시다.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강아지를 끌어안고 강아지에게 엄마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부모 보다는 자식들 위주로 살아가며, 사소한 일에 아옹다옹 세상살이에 빠져 멀리 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이것이 현실이다.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끄러운 점은 없는지 얼마나 회개하며 잘 살려고 노력했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내가 가진 것을 얼마나 나누고, 봉사하고, 희생을 했는가? 부끄럽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희생과 봉사는 뒤로 빼고, 내 몫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몫이라고 뒷전이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회개의 삶이 절실하다. 하지만 올곧은 마음, 따듯한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아직은 우리의 앞날에 기대해 보아도 되지 않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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