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두 번 사창동으로 수업을 하러 간다. 자동차를 몰고 갔다가 몰고 오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여기쯤에 넝쿨이 우거져 있던 포도밭이 있던 곳은 아닐까 생각한다. 별다른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유년의 기억 속으로 자꾸만 걸어들어 간다.

1960~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한번쯤은 사창동 포도 과수원에 들른 적이 있으리라. 길가에 세워진 원두막에 올라 앉아 오가는 사람들도 바라보고 땀도 식히며 늘어지게 수다를 떨다 돌아오곤 했었다. 녹음이 우거진 포도 넝쿨 아래에 들어서면 마치 아늑한 굴속에 들어 온 것 같았다. 주인아저씨가 후하게 담아주는 바구니를 들고 원두막에 올라가 온종일 깔깔대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인지 짚어낼 수가 없다. 충북대 못미처에 있었다는 것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 온 만큼 내 기억도 추억도 사라지고 있다. 시내를 나가서 아이들에게 여기 어디쯤에 양장점이 있었고 찻집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 시큰둥하게 듣는다. 케케묵은 고리짝 이야기를 한단다.

어느새 나도 날긋날긋한 고리짝이 됐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뛰고 나는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하니 과거에 침식될 수밖에 없나보다. 눈 뜨면 바뀌고 바뀌는 세상 속에서 내 기억과 추억이 아쉬워 흔적들을 찾게 된다.

쥬네스 건물이 있던 자리에 높은 종탑이 있었던 경찰서가 있었던 것 같다. 집집이 시계가 귀했던 시절이라 종탑의 확성기를 타고 들리는 소리를 듣고 12시가 된 줄 알았다. 오종이 불면 놀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점심을 먹으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 중앙공원 시민관 영화간판 속의 김진규, 신성일 사진을 보며 옆집 언니에게 무슨 영화가 들어왔다는 정보를 전해줬다.

어린 시절의 내 놀이터는 서문동이다. 아이들과 무심천과 중앙공원, 서문다리 주변을 몰려다나며 놀았었다. 무심천에서 사내아이들은 멱 감고 얼음배를 타며 놀았고 여자아이들은 나물도 뜯고 빨래를 하기도 했었다. 다리 밑에는 거지와 넝마꾼들이 터를 잡고 살았고 서문다리 밑은 아이를 찍어내는 공장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많은 아이들이 서문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을 듣고 살았으니 말이다. 뚝방 위에는 짐을 실어 나르는 노새와 마부들과 말똥 천지였고 그 자리에서 여름 장마에 통째로 떠내려가는 초가지붕과 황소를 본 적도 있었다.

서문동에서 철길을 넘어 주성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의 서문대교가 예전에는 철로가 지나가는 자리였었다. 철길에서 동글동글한 자갈도 줍고 못을 주워 철로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납작하게 만든 다음 썰매를 만드는데 쓰기도 했었다. 많은 아이들이 그 위험한 길을 매일 오가면서도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가끔씩 철로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양쪽에서 풀무질을 하듯 손으로 구르는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적도 있었다. ‘한번만 태워주세요’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한 번도 타본 적은 없었다.

세월은 내 눈과 마음을 작아지게 만드는지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던 그 넓었던 신작로가 지금 보면 좁은 골목에 지나지 않는다.

김장철이면 산처럼 쌓여있던 배추, 무 김장시장도 남주동 우시장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어느 해인가 한밤중에 활활 불길이 일기도 했던 그 벅적거리던 서문시장도 지금은 썰렁하기만 하다. 엄마 치마꼬리를 붙들고 시장을 따라가면 가게 아주머니들이 멸치며 꼴뚜기 말린 것을 한 줌씩 집어주기도 했었고 지나가며 하나씩 집어 먹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요즘은 당장 절도죄로 집어넣을지도 모르겠다.

추억의 길들은 참으로 아득하다. 점점 멀어지는 기억들을 붙잡아두고 싶은데 가뭇없이 사라지기만 한다. 서문동 주변을 서성이며 내 어린 시절을 한줌 주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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