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가 그렇듯 한해가 가는 것을 지인들의 송구영신 인사를 들으면서 실감하게 된다. 뻔한 것이지만 새해에는 꼭 지키리라는 다짐도 해보고 대청소도 한다. 문구점에서 새 수첩과 새 펜을 사며 야무지게 새해를 보낼 것처럼 시작을 한다. 작심삼일이라고 벌써 슬슬 게으름이 시작되었고 며칠이 지나면 그래도 삼일만큼은 약속을 지켰으니 이익이라는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나의 새해맞이는 늘 이런 식으로 시작이 된다. 그런데 올해는 작년과는 다르게 마음이 무겁다. 장가를 들이지 못한 나이 꽉 찬 두 아들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새 대통령을 뽑고 나서 뭔가 세상이 좀 달라지겠지 스스로 위안을 해보기도 하지만 가진 것이 변변치 않은 나로서는 여전히 벅찬 일이다.

비단 내 집뿐만 아니라 장성한 아이들을 둔 집들의 공통적인 걱정이 정작 본인들이 결혼할 맘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차면 으레 결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우리들과는 사고가 많이 다르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예전이 나았던 것 같다. 비록 풍족하지 못하여 부모님들은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했지만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큰 고민 없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호화 결혼식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혼수 시비도, 아파트를 장만할 필요도 없이 간소한 결혼식에 단칸방을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고 시작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뭐가 그리 복잡한지 모르겠다. 예단비가 오가야 하고 벽에 걸 한 장의 사진이면 족할 웨딩 사진을 수없이 찍어야하고, 전세라도 아파트를 마련해야하고, 양가 부모가 단체로 한복을 맞춰 입고, 잡탕처럼 한 접시에 수북이 담아 먹는 뷔페를 꼭 대접해야하는 소모적인 일에 부모도 결혼 당사자들도 질리고 만다. 그러니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한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실속 없이 보여주는 일에 너무 많은 소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살기 힘들다고 하면서도 체면을 차리는 일에는 후하게 돈을 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를 보고 있으면 육영수 여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 당시 허례허식 버리기, 절약하기, 사치하지 않기를 몸소 보여줬었다. 물질은 풍족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시대를 건너다보니 아침마다 듣던 ‘잘 살아보세’라는 구령 같은 노래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끼니 굶지 않고 잘 먹기 위한 ‘잘 살아보자’였다면 이제는 정신의 풍요를 위한 ‘잘 살아보세’가 되어야겠다.

올 겨울처럼 눈이 많이 오는 때는 적어도 내 집 앞의 눈이라도 쓸어내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웃 간에 서로 왕래하며 정을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다. 동네의 외톨이 아이를 불러 밥 한 끼 먹이려 해도 유괴범으로 몰리는 흉흉한 세상이 맑게 정화되었으면 좋겠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착한’이라는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착한 결혼식을 찾아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윗사람들이 먼저 착한 결혼식에 앞장서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라의 힘이라는 것이 물질의 풍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꿈꾸는 아이들에게 있다면 먼저 부담 없이 결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새해의 꿈같은 소망은 아이들을 짝지우고 토끼 같은 손주들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을 왜 우리는 꿈같은 소망이라고 해야 하는지 입이 쓰다.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녀석은 결혼 이야기에 여전히 심드렁하다. 돈을 쥐어주지 못하는 가난한 부모들은 자신들의 탓인 것 같아 공연히 미안해진다.

취업을 앞둔 사람들도 결혼을 앞둔 사람들도 나처럼 대책 없이 늙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민으로 새 소망을 품고 있다. 새해에는 모두 모두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장독 위에 정화수 한 사발 떠 놓고 가족을 위해 천지신명께 기원하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제발 아이들 장가들게 해달라고 두 손을 모아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