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의 기운을 이분법적 방법으로 구분 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음(陰)과 양(陽)으로 대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음양(陰陽)을 살펴보면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물과 불의 자연적 특성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물과 불을 음양의 징조라고도 하지만 음양은 사실 한 가지 기운 속에 담긴 두 가지 기(氣)의 측면을 구분하는 것이다.
요즘을 사는 필자는 변화하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 탓인지 원래의 음양의 근본원리보다는 대립과 반목이 넘치는 우리를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얼마 전 조촐한 송년모임 자리에 함께할 기회가 있어 주점을 찾았다. 마침 하루 전에 끝난 대선의 열기 때문인지 여기저기 테이블마다 안줏거리로 나온 화제는 단연 정치 얘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화기애애해야 할 자리가 정치얘기로 서먹하고 무거운 자리로 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네 정치현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더라. 오죽했으면 술맛 떨어지는 정치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핀잔 섞인 말들이 오가겠는가.
물론 이번 대통령선거가 양자대결로 귀결되면서 극렬한 대결구도를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옳은 것과 나쁜 것만이 존재하는 대립과 반목으로만 보여 진 우리 정치의 현실을 목도하게 된 것 같아 뒷맛이 참으로 씁쓸했다.
나는 위에서 자연 환경이나 사회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란 언급을 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주체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사람들, 우리들이라는 대전제는 언급의 대상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51.6%대 48.0%는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선거 득표율이다. 말 그대로 2%의 대결이었다. 부족하거나 넘치는 수치가 2%다.
결국 절반의 국민들은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분명히 다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마치 틀린 줄을 선 것처럼, 틀린 오답을 쓴 것처럼 호도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현직 경찰대학의 모 교수는 보수를 자칭하면서도 서로기대고 부둥키며 아픔을 위로하고 위로받기 위해 서울서, 광주에서 껴안아주기를 하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경상도 사람을, 보수라 자칭하는 사람을 만나 아무런 대가없이 그저 한번 안아주고 안기는 그것을 위해 몇 백 미터씩 기꺼이 줄을 서는 사람들을 봤다. 그 교수도 자신이 위로받고 싶어서 그 자리에 선 것 이라며 뜨겁게 포옹을 나누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것이 진정한 위로인지 알겠더라. 결국 자연의 순리인 음양의 이치처럼 대립의 상극이 아닌 순환의 상생이 돼야하는 이유가 이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절반의 목소리는 상생을 위한 변화의 목소리지 반대나 적의(敵意)를 품은 절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절반의 국민들이 좌절과 절망으로 눈물 흘려야 하는가? 최선과 차선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대안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낙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당장 뭔가를 보여주고 어떤 결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잖은가? 변화는 일순간이 아니라 천천히 지속적이라야 그 의미를 더 할 수 있다.
아직은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천천히 기다려 줄 것이다. 충분히 준비하고 보여주는 것만이 순환하고 전화하는 상생의 올바른 도의를 찾는 길이며, 절반의 국민들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좌절과 분노보다 희망과 기쁨의 눈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국민 누구나의 바람은 지금의 기대와 희망으로 치는 박수를, 떠날 때 아쉬움과 감사의 박수로 이어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