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속에 있을 때 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만국 공통어로 음악은 사람의 감성을 어루만져 준다.

영화 연극 속에도 배경으로서 음악만한 촉매제도 없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틈의 이음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에 그렇다.

지음이란 한자어로 음을 알다라는 뜻이다. 음악의 선율로서 맺어진 사이를 지음지간이라 한다. 이 말은 중국의 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거문고를 잘 타는 백아와 그 현의 소리를 좋아한 고향 친구 종자기라는 그 두 사내들의 거문고로 맺어진 우정을 일컫는 말이다.

백아가 달빛의 아름다움을 보며 거문고를 타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종자기는 달빛이 너무 아름답구나 하며 감탄사를 했다. 또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는 강물이 휘돌아 굽이치며 흐르고 있구나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천지간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고 있는 친구야 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위안의 힘을 얻을 것이다. 친구의 모습과 눈빛만 봐도 그의 기분과 상태를 알 수 있다면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 같을 것이다.

종자기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자 그 뒤로 백아는 거문고의 현을 끊고 다시는 손에 거문고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더 이상 이해할 세상의 사람이 없다고 단정 지었기 때문이다.

나는 젊었을 때 격한 성정으로 인해 사나운 바람이 내면으로 들어와 휘몰아치던 날들이 많았다. 그 광폭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제대로 한방 맞으면 몇날 며칠이고 쓰러져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온갖 비극적 결말로만 치닫던 시절이었다.

남녀가 서로 다른 개성으로 이십 몇 년을 살다가 한 공간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불같던 연애 시절의 시간을 돌아봄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시간들이 시퍼런 강물로 휘돌아 치기만 했다.

어느날 밤 스스로의 분노와 서러움에 한밤중 현관문을 나섰고, 밤바람 속 아파트 옆 천변을 배회했다. 새벽 3시의 천변은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들만 그 봄밤 몽환적인 자태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꽃나무 아래서 갈 길을 잃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아이처럼 망연히 천변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홧김에 나왔지만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고, 그 깊은 밤에 전화로 내 처지를 하소연 할 수 있는 얼굴들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설령 떠오른다 해도 그 시간에 연락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민폐를 끼치는 것인가. 그렇다고 형제들이 있는 친가 쪽으로는 더더욱 연락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나로 인해 받을 상심들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얘졌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순간 J를 떠올렸다.

그 시간에 깨어 있을 사람은 J가 유력했다. 밤샘 글 작업을 하는 그녀였기에 혹시나 하고 손 폰으로 신호를 보냈더니 그녀는 벨이 서너번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 그리곤 다짜고짜 자기집으로 오라며, 벌써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파트 현관문을 살짝 열어 놓고 있기까지 했다. J는 자기는 작업할 것이 많으니 어서 잠을 청하라고 현관옆방에 새로 빤 이불을 깔아주며 어미가 제 아이에게 하듯 나를 재웠다. 정오가 다 돼서 일어난 나는 그녀가 차려준 늦은 아침밥을 이렇다 말도 없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말 없음 속에서 벌써 그녀는 사건의 개요를 다 파악했고 나 또한 구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됐으니 그런 관계들이야말로 더 큰 위안으로 작용한다. 눈빛과 분위기만 봐도 알아채는 사이의 지음지간이야 말로 진정한 소통이며 관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소한 것도 같이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어도 좋은 친구와 따뜻한 밥상을 대하며 가벼운 안부를 묻고 싶은 날이다.

올해의 달력도 한 장만 남았다. 벌써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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