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플라톤은 현자(賢者)가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고 동양의 공자는 군자(君者)가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왜 군자가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가? 군자는 맨 먼저 자기를 다스린 다음 남들을 편하게 하는 사람인 까닭이다.

군자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며 겁내지 않는 사람이다.

군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반성해 보아도 허물이나 뉘우침 따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을 두려워하고 겁내겠는가.

이 말은 덕을 행하는 사람은 곧 군자의 마음을 지닌 것임을 헤아리게 한다.

군자는 허물이나 뉘우칠 것이 없으므로 무엇이든 분명히 알려고 하는 사람이다.

군자는 지자(智者)인 것이다. 잘못 알아 잘못을 저질러 버리는 것을 범하지 않는 사람이 지자(知者)인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지(知)란 사물을 아는 지식에 앞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知人)을 말한다. 또한 군자는 남을 편하게 하므로 인자(仁者)에 속한다.

어진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을 돕는 것 밖에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남에게 못할 짓을 한 놈이 두려워할 뿐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군자는 자연스럽게 용자(勇者)가 된다. 용자이므로 군자는 겁내지 않는다.

덕(德)은 이러한 군자의 마음에서 솟아나 세상을 편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온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하여준다.

덕(德)을 높이는 것은 성실과 믿음을 으뜸으로 삼고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다.

성실이란 영근 열매와 같다. 풋풋한 열매는 덜 익어서 갖추어야 할 것을 덜 간직한 상태다.

성실한 마음이 갖추어야할 제 맛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바로 인의(仁義)라고 하는 것이다. 인의를 생각하고 행하는 마음이 곧 성실한 마음이고 그러한 마음은 곧 믿음을 지닌다.

내가 남을 믿어주면 남도 나를 믿어준다는 확신이 곧 신(信)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늘의 믿음도 아니며 신(神)의 믿음도 아니다. 그러한 믿음들에 앞서서 사람이 먼저 사람을 믿어야 한다.

덕이란 사람을 믿는 성실한 마음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일을 앞세우고 얻기를 뒤로 하면 덕은 높여질 것이다.

이는 곧 공치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일을 빙자해서 무엇을 요구하면 압력이 아니면 협박이 되기가 쉽고 득이 있으면 한편이 돼주고 득이 없으면 적이 되는 경우를 만든다. 자신의 잘못을 공격하지만 남의 잘못을 공격하는 일이 없으면 사악함을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 순간의 분을 참지 못해 몸을 망쳐 부모의 가슴에 못질을 하지 않으면 이 또한 미혹을 깨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들을 깨치게 되면 내 자신이 사람을 맞이하는데 얼마나 소홀했는가를 뉘우치게 된다.

일을 남보다 많이 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왜 남보다 적으냐고 불평을 늘어놓고 공치사를 하는데 얼마나 열심인가를 한번 반성해 보게 한다.

그리고 나는 똥 묻은 개이면서 겨 묻은 개를 흉보고 얕보는 짓을 범하지 않았던가를 뒤돌아보게도 한다.

나아가 한순간 참았으면 될 일을 가지고 참지 못해 언성을 높이거나 주먹질을 하려고 덤볐던 어리석음이 부끄럽게 된다.

효자는 몸가짐을 삼가하여 부모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가 좀 더 안다면 깡패도 줄어들 것이고 범법자도 줄어들 것이 아니겠는가.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 또한 서양에서 말하는 현자(賢者)나 동양에서 말하는 군자(君者)의 모습을 갖추었으면 한다. 그러한 사람이 뽑혀야 국민이나 국가가 안정될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 온 국민의 염원일 것이다. 덕(德)과 통하는 사람, 덕과 통하는 정치, 덕과 통하는 세상이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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