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제짝을 부르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마을에 이삿짐 보따리와 함께, 신접살림의 나는 무릎걸음을 막 시작한 어린 딸과 함께 트럭에서 내렸다.

등 뒤 포대기 속 어린것 눈에도 사뭇 다른 환경은 어리둥절해 보이는지 옹알이를 했다. 남도의 낯선 사투리 말은 S소읍에서 한동안 나를 농아 같은 겉도는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세든 주인집 사람들은 표준말을 쓰는 사람을 집에 들이니 현지인과 다른 호의를 내게 보였으며, 시도 때도 없는 막무가내 친절이 때론 불편하기까지 했다.

허나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인정이 넘치고, 그것을 덕목으로 여기는 그들의 진의를 안 이상, 서너 달이 지난 후에는 그들의 언어가 귀에 거슬림 없이 순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S소읍은 천변을 따라 장이 섰고, 전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큰 장이라서 그런지 각양각색의 농수산물들이 신선하게 5일 마다 사람들을 맞이해 주었다.

그녀는 세든 집의 앞집에 사는, 애 엄마라기엔 너무도 앳된 새댁이었다. 나이 마흔에 큰딸을 시집보냈다는 앞집 아주머니는 그 며느리도 마흔 중반에 들였으니 얼마나 빠른 혼사를 치른 사람인지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 의아했다.

그녀의 시부모들은 내게도 아주 호의적이고 인심이 좋아 집안에 대소사가 있는 날이면 늘 나를 불러 음식들을 내놓고 밭에서 나는 푸성귀들을 나눠 주곤 했다. 그녀는 근처 공단에서 작업반장으로 있는 남자를 만나 너무도 어린나이에 결혼을 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공장에 취직해서 일하다 남편을 만났다는데, 손이 재고 일을 하도 잘해 일찌감치 점찍어 서둘러 남편은 10살이 넘는 나이 차이임에도 신부로 맞이했단다.

그때 그녀 나이 20살이었다. 그 나이는 어느 누가 봐도 눈부신 나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한창 멋 부릴 나이에 벌써 한아이의 어미가 되어 있었고, 그 흔한 기초 화장품도 얼굴에 바를 수가 없었다. 유별난 시아버지는 화장품 냄새를 무척 싫어해 아예 화장할 엄두를 못 내고, 생기 잃은 시든 꽃으로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혹여 집안의 말을 물어내지나 않을까 해서 인지 마을 새댁들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게 하니, 그녀는 철창 없는 감옥에서 형을 사는 수인처럼 내 눈에 비쳤다. 장손이라는 권위속의 남편은 그녀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어느 날 텅 빈 집안 샘가에서 그녀는 채소를 씻다 말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나는 먼 곳으로 시집간 어린 누이의 막막한 눈물바람을 본 것처럼 가슴께가 저릿하니 아팠다.

그길로 울고 있는 그녀를 데리고 읍내로 나와 난전에서 머리핀도 사주고, 먹고 싶어 하는 냉면도 사줬다. 그녀는 나의 사소한 호의들에 무척 감동을 했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의 시간들은 그녀 스스로 당당하게 헤쳐 나가야 할 길이었다. 어느 누가 대신 걸어 줄 길이 아니었다. 며칠 뒤 양은 그릇에 갓 담근 배추김치가 집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수줍게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 했다.

그 뒤로 세월은 많이 흘러갔다. 순박하기만 했던 그녀도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상처도 없는 좀 극성맞은 아이들의 어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몸에 적당히 살도 붙어 후덕한 여인으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유년시절 어두운 골목 모퉁이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에 휩싸여 울고 있을 때, ‘얘야 이리 오너라’며 이끌던 이웃들의 따듯한 손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마음이 곤궁하고 한없는 어둠속에서, 혼자라 눈물이 더욱 앞서는 세월에도 가만 다가와 따듯한 손 내밀어 잡는 이 있는 한, 삶은 그렇게 메마르고 팍팍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너나없이 위로가 필요한 시절에, 어디선가에서 울고 있을 그 영혼들에게 손을 내미는 따듯한 풍경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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