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관 쉐마미술관 관장

 1963년 청주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시절은 정신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남문로 2가 32번지로 옛날 현대극장 자리였던 곳 이다. 그 곳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첫 돌 지나서부터 성장한 곳은 북문로 1가 25번지로 지금의 현대약국 자리에서 1963년까지 17년간을 살았었는데, 그 해 여름 부친께서 다른 사업에 손대시어 실패한 후 부도가 나면서 번듯한 2층 사진관과 살림집 모두 차압당하고 초라한 빈 집으로 피난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원래 부친께서는 사진업을 하셨는데 청주에서 현대사진관이라면 당시에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사진관이었다. 성장과정을 비교적 유복하게 지냈지만 뜻밖에 원양어업 사업에 투자하면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고 나니 앞길이 망막했다. 그런 와중에 그 해 가을 홍익대학 주최 전국중·고등미술실기대회에서 특선으로 입상을 하고, 충북도 불조심 포스터 공모전에서 2등상을 수상하면서 미술부 활동에 매진했다.

당시 청주고 미술부는 1년 선배로 채홍범, 양윤식 선배가 있었고, 동기생은 박인서, 김경화가 있었으며, 1년 후배로 한희환, 한석우, 김규창 등이 있었는데 우리들이 전국대회에서 주요 상을 휩쓸 만큼 막강한 미술부였다. 가정의 어려움은 심해졌지만 3학년이 되면서 오히려 공부에 몰입하게 되고 미술부 활동도 더욱 활발하게해 가을 실기대회에서도 몇 차례 상위권 입상을 했다.

그 해 12월 대학진학 원서를 쓰면서 서울대 진학학생 수로 명문고 순위를 평가하던 시절 대학진학에 대한 아무런 입시정보도 없이 담임선생님과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박인서군은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나는 서양화과에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말았다. 석고데생만 해오던 나에게 처음 겪어보는 인체데생 실기시험은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홍익대학으로 진학한 동기들은 모두 합격하고 서울대 지원자는 모두 떨어졌으니 청주고 미술부는 반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불쾌한 낙방 뒤에 후기 진학마저 포기하고 반 건달생활을 하는 둥 취업을 하는 둥 하면서 전전긍긍하며 한 해를 보내게 되지만, 나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던 또 다른 보람 있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한동안 청주극장, 중앙극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수많은 영화를 보게 되고, 하루 반나절은 당구장에서 보내고, 만화책으로 보았던 삼국지도 읽게 되고, 여기 저기 여행도 다니게 되고 그야말로 먹고 노는 신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새옹지마라더니 내 신세가 그리된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 반년넘게 누리던 자유도 부모님의 걱정과 친구, 후배들의 권유로 다시 대학진학을 결심하고 홍익대 미대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한 해 늦게 진학을 했지만 특대생 입학을 하게 되고, 재경 충북협회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모든 일들이 전화위복이 됐다.

좌절이란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라 생각한다. 지난날 진학에 실패하고, 첫사랑에 실패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때문에 갈팡질팡 할 때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내 인생의 약이 되는 것 같다. 최근에 나는 중국 여행을 자주하게 되면서 ‘초한지’를 읽고, 벤 자민의 ‘덩샤오핑’을 읽고 ‘삼국지’를 다시 읽곤 한다. 45년을 화가로, 30여년을 교수로 살아왔지만 미술사와 평론을 읽는 재미보다 틈틈이 읽는 역사소설과 인물펑전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유비는 도원결의 한 아우 장비에게 “형제는 수족 같고 처자는 의복 같다”했다. 이 말은 처자는 의복 같아서 꿰맬 수 있지만, 의형제를 맺은 형제는 수족 같이 한 번 끊어지면 이을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신의를 지킬 수 있는 나의 수족 같은 의형제나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젊은 여러분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좋은 친구보다 더 큰 자산은 없다”는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