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동료와 산책을 했다. 산책길에서 귀뚜라미와 풀벌레 소리가 요란한 것을 듣고는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모기가 들어가고 귀뚜라미가 나온다는 처서가 지난 지 2주가 되었으니 계절도 어찌하지 못하는 듯하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만났다고 한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모기가 하는 말이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찢어졌네’, 모기가 톱은 왜 들고 다니는가 하고 물으니 ‘추야장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 낭군 애(창자) 끊으러 가져간다.’고 하고 있다.

그 모기가 올해는 더위로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지는 못한 듯하다. 올여름은 더위란 더위는 모두 왔다 갔다. 18년 만의 더위라고 하니 오랜만에 만나 사람에게 올여름을 어떻게 지내셨느냐고 묻는 것이 첫인사가 되고 있다. 그 계절이 그냥 지나는 것이 배가 아픈지 전국을 태풍과 물난리를 일으켜서 농민들의 가슴을 태우고 있다. 여기에 떨어진 낙과까지 좀도둑들이 가져간다는 소리에 가을 귀뚜라미의 애 끊는 톱 소리는 더 요란할 것이다.

가을의 귀뚜라미 소리는 향수를 부르고, 추억을 새겨서 목석 같은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모습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계절로 생각한다. 귀뚜라미를 볶아먹는 동남아나 투견이나 투계와 같이 귀뚜라미로 싸움을 시켜서 도박하는 중국과는 달리 우리에 있어서 귀뚜라미는 정서적이고, 감성적이며, 인간적인 것을 상징한다.

가을은 독서에 계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책 읽기 좋은 독서팔경(讀書八境)으로 (1) 집을 떠나 있을 때 (2) 술 마시고 약간 취기가 남았을 때 (3) 상을 입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4) 옥에 갇혀 있을 때 (5) 앓아누워 있을 때 (6)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 (7) 고요한 절간 (8) 마을을 떠난 자연 속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아파트와 시멘트 숲에 사는 사람들에게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을 접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고, 천고마비의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보는 것이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있으니 자기를 찾아서 떠나는 독서 여행을 권하는 것도 욕먹을 일이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책의 절반이 가을에 팔린다고 할 정도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었다. 그러나 그 공식이 없어진 지 오래되고 있다.

가을 귀뚜라미로부터 멀어지니 인간다움으로부터 멀어지고, 책으로부터 멀어지는 계절이 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어린아이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나 탐욕으로 얼룩진 부정부패의 소식들은 귀뚜라미 소리가 서민의 애 끊는 톱 소리가 되고 있다. 이 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책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자연 속에서 함께하는 정이 있는 소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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