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부산에 다녀 올 일이 있었다. 부산에서 책이야기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생면부지 사람들 속에서 고향이 ‘충북 청원’이라고 소개하는 분을 만났다. 어찌나 반갑던지, 행사 내내 긴장했던 것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 했으며 부산이라는 낯선 도시가 정겹기까지 했다.

같은 지역 출신을, 그것도 다른 지역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경계의 벽은 사라지고 상대방이 단박에 정겨워져 두 손을 부여잡고 반가움을 표하게 된다.

거기에는 도대체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일까. 같은 지역 사람들에게는 그 고장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지역성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다.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인 산세와 물길, 도로의 생김새는 사람들의 심성에 영향을 준다. 또한 그곳만의 문화적 특성이 세대를 이어 사람들 면면에 공존하게 되는데, 이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교통, 통신의 발달로 지역적 특색이 흐릿해진 면도 있지만 아주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같은 지역에 살았다는 것은 그러한 특성을 공유했다는 뜻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솥밥을 먹은 것 같은 느낌은 바로 그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지역성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세를 형성하기 위해 타 지역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사람을 쓸 때 공정성을 잃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동향 출신에 대한 호의를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이처럼 어떤 지역에 살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증명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알려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앎’이 중요하다. 그 지역의 역사, 자연환경, 인물, 지명유래 등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아는 것과 통한다.

가끔 나는 소설에 내 고장의 지명을 의도적으로 넣을 때가 있다. 굳이 출신지를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그곳만의 분위기를 허구의 어떤 도시로 상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러한 나의 태도를 독자의 상상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사실적 지명이 거론되면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거나 작품의 폭을 축소 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우리 지역의 이름을 소설에 넣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그 욕심은 또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역에 대한 애정, 의리 같은 것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예술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은 시대를 넘어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어떤 도시는 영화의 배경으로, 어떤 도시는 문학 작품 속 배경으로 시간을 넘어 대표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 춘향전의 ‘남원’ 드라마 가을연가의 ‘남이섬’,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 등……. 아마도 글 속의 지명 거론은 그러한 욕심에서 출발한 게 아닌가 싶다.

그 지역의 사투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역적 특색을 가장 많이 띠는 것은 ‘말(언어)’일 터인데, 점점 그 차이가 사라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나는 말할 때 충청도만의 억양이나 사투리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숨긴다고 표 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게 나인데, 나를 만든 것의 일부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러 사투리도 섞어 쓰고 억양도 굳이 서울말로 하려들지 않는다. 촌티가 난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촌사람이 촌티 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문학적 토양의 뿌리 또한 지역에 있기 때문에 내 글 속에는 여전히 지역적 냄새가 풀풀 나게 될 것이다. 그것 또한 촌티 난다고 해도 할 수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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