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번 만나고 싶다.’ 텔레비전 프로다. 연속극도 즐겨보지 않는 나다. 가끔씩 이 프로를 본다. 헤어진 사람 있어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재미가 있어서도 아니다. 가슴에 묻혀 지워지지 않는 사람들, 어딘가 살아 있다면 만나는 날도 올 것이고, 만나는 날이 있겠지 막연한 기다림과 희망도 있다.

 남편이 떠난지 14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4년. 강산이 한 번도 더 변했을 시간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즐거운 일, 슬픈 일, 행복한 일이 있을 때 마다 절절히 생각나는 사람이 남편이다. 지울 수 없어 가슴에 묻혀 진 사랑이다.

오늘도 아침부터 꼭 한번 만나고 싶다. 사연을 듣고 만남의 시간이 오길 간절히 바라기도 하고 반가운 전화라도 오면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듯 한없이 기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어떤 사연이든 생이별로 서로를 그리며 살다가 30년, 40년 만에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저렇게 살아 있으면 언젠가 만날 수 있으련만…. 남편을 만날 수 없는 아린 마음을 씻어 버리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버스를 탔다. 시내를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혀 생각 밖의 사람이다. 30여 년 전 근무했던 남편의 제자다. 그렇잖아도 아침에 남편이 보고파 한차례 울고 나왔는데 전화를 받는 손이 사르르 떨려온다. 눈에선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린다. 옆 사람이 눈치 챌 까봐 손수건을 꺼내 살며시 눈물을 찍어 낸다.

유난히 착하고 심성이 고왔던 사람, 교사란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학생들을 사랑 했던 분이었다. 세상을 떠나고도 몇 년을 두고 학생들이 안부 전화를 해 올 때면 마음이 아팠다. 차마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못해 외국으로 여행을 가셔서 안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었다.

유난히 몸이 약해 16km 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통근을 하지 못했다. 중학교 근처에 부엌이 달린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자취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퇴근시간이면 아이들 손잡고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이삭들 사이로 논둑길을 걸어 남편을 기다리는 행복을 어떻게 표현을 하랴.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튀김도 해 주고 부침도 해주며 선생님이란 남편의 자리, 나 또한 전직 교사였기에 학생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옛 생각에 잠겨 그리움의 눈물이 고였다. 진정 남편을 만나고 싶다. 한 번 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 품에 안겨 펑펑 울기라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당신을 떠나보내고 살아 온 내 삶의 모든 걸 영상을 돌리듯 돌려 보이고 싶었을까? 학교 총동문 체육회를 개최하는데 지금까지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만 생각했는데 사모님 생각이 났다면서 꼭 참석해 달라는 전화였다. 동문지에 글을 실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에 ‘남편을 그리며’란 제목으로 보냈다. 고마웠다. 아직도 남편을 생각하고, 나까지 기억해 주는 그 제자들에게서 잊혀져 있지 않고 기억속에나마 남아 있음에 감사했다. 우리 식구의 삶이 잠시 이어지던 곳, 학생들과의 관계가 가장 많이 이뤄졌던 곳, 참석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주일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오니 차를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해주는 제자들이 고마워

 도착해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아이들, 아니 지금은 모두가 가장이 됐고 주부가 됐다. 한 아름 꽃다발도 준비 돼 있었고 나를 위한 선물도 준비돼 있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으며 지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음식을 해서 맛있게 먹었던 이야기, 우리 가족 나들이에 눈치 없이 동행했던 이야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물이 채었을 때 내가 업어 건네준 이야기, 어떤 아이는 보온 도시락을 사 줘서 고마웠다며 지난 옛 이야기들이 현실처럼 나오고 있었다.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 것들까지 그들은 고마워하고 있었다. 남편교직생활에 보람을 갖게 해 주고 싶어 내 제자처럼 진심으로 대해 줬던 것이 그들과 통했나보다. 기억해 주는 그 제자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순수했던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게 됐다. 30여년 후인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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