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집안의 어르신들이 스승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른들께 여쭤보면 다 해결이 되는 세상이었다. 내 할머니는 글자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분이셨다.

할머니의 총명함 못 따라

그러나 집안의 애경사 날짜는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마을 사람들의 태어난 달과 제삿날까지 틀림없이 기억하고 계셨다. 달력에 큼지막하게 제삿날과 친지들 생일을 적어두시는 어머니보다 더 정확히 기억해 잊지 않고 챙기신다. 누구는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로 시집을 갔으며 그 조상이 무슨 벼슬을 했는지도 줄줄 꿰고 계셨다. 전엔 나도 웬만한 전화번호 정도는 외고 있었는데 휴대전화의 단축버튼이 나오고 부터는 머릿속이 까맣게 지워져 버렸다. 두 아들의 전화번호도 번번이 잊어버려 저장된 주소록을 뒤적여 전화를 한다.

편리를 위한 휴대전화는 왜 그리 복잡한지 결코 편리하지만은 않은 애물단지이다.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나서는 더 미칠 노릇이다. 문자라도 하나 보내려고 하면 한 글자를 수도 없이 지우고 다시 써야한다. 글자판은 또 왜 이리 작은지 뼈마디 툭툭 불거진 투박한 손가락으로 ㅏ, ㅑ, ㅓ, ㅕ를 정확히 누르기란 콩 더미에서 참깨 고르는 격이다. 혹시라도 뭘 잘못 누르면 요금이 엄청 나온다는 말에 이상한 것이 화면에 뜨면 허겁지겁 전원을 꺼버린다.

얼마 전 베트남으로 파견 근무를 간 아들에게서 일주일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문자를 보내 봐도 답장이 없으니 꼭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밤낮으로 휴대전화를 끌어안고 사는데도 소식이 없다. 한 밤에 소파에 걸터앉아 애꿎은 전화기만 주무르고 있는데 스팸메시지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어떻게 스팸메시지 보관함을 찾아 들어 갔더니 두 아들의 메시지가 그곳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메시지를 삭제할 때 또 이 굵은 손가락이 삭제 버튼 대신 스팸신고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두 아들, 어머니, 친구들까지 모두 스팸으로 신고 돼 있었으니 이 아둔함을 어찌할까.

세월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뒷전에서 우왕좌왕하고 문명의 이기를 사로잡지 못해 질질 끌려가고 있는 나이 듦이 서글프다. 소싯적 독립선언문을 줄줄 외고 옛 선인의 시조와 시를 입에 달고 살던 그 총기는 어디를 갔는지 무지몽매한 까막눈이 돼 버리고 말았다.

글쓰기 교실에 나오시는 어르신들은 가끔 휴대전화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데 어떻게 읽는 거냐고 전화기를 들이민다. 나도 까막눈인데 그분들보다 조금 젊다고 잘 알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전후의 황폐한 나라를 이만큼 부흥시키기 위해 손끝이 닳도록 일만하신 분들이 문명의 이기를 다스리지 못해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고만 다니신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부재를 느끼며 살고 계신 것이다.

요즘은 신문을 보지 않아도 중요한 뉴스를 휴대전화로도 볼 수가 있다는데 우리는 보지 못 한다. 요금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글자가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정보부재, 몸만 고달파

어제는 모처럼 걸어서 재래시장을 찾았다. ‘퇴근 시간에 택시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서 택시가 안 오는 것이겠지.’ 집을 향해 몇 발작 걷다가 되돌아보고 또 몇 발작 걷다가 뒤돌아보고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오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됐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이렇게 차가 없을 리가 없는데…’ 때마침 걸려온 지인의 말을 듣고 서야 오늘 택시가 총파업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방송에도 수없이 전달을 했다는데 귀 닫고 정보의 부재 속에서 사는 나는 또 몸만 고달프게 만들었다. 아, 이 까막눈의 서글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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