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청주-기획특집 '두근 두근 명사들의 성장 이야기'

1970년. 그 해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좋은 대학을 가기위한 전쟁하는 학년이었지요. 학교 가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지요.

그런 각오를 하고 고 3을 맞이했지만 첫 번째 치른 모의고사의 성적표를 받아든 날, 너무나 무기력한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낙심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꿈은 높아 좋은 대학의 원하는 학과를 가서 내하고픈 일을 마음껏 하고 영광스런 삶을 생각했는데요. 현실은 여지없이 꿈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어려워진 집 형편으로 고등학교 2년을 후배들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 고 3에 올라와서는 정작 내 공부가 급해 어머니가 우리 학교에서 가까운 모충동에 방 2칸짜리 셋방을 얻어 아버지, 두 동생 그리고 나까지 네식구가 살도록 했습니다.

가게가 있는 내덕동에서 모충동까지 오가며 밥을 해주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는데 왜 그리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땐 다 어려웠는데요. 왜 집의 어려운 형편을 속상해하고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공부는 왜 안했는지요.

공부는 안 되고, 당연히 성적은 안 오르고, 거기다가 스트레스까지 겹쳐서 더욱 더 책은 팽개치고,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하냐고 원망만을 해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고 3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왔는데도 나는 변함없이 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상을 원망하기만 했지요.

당연히 선생님도 걱정이 크셨고 그냥 지켜보시기만 하시던 아버지도 마침내 걱정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 조용한 곳에서 머리를 쉬고 오면 안 되겠냐고 말씀드렸더니 당시 명암방죽위에 있던 ‘혜능보육원’으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곳 원장님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곳에서 며칠을 기거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꽤 여러 명의 고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와 이별하고, 그것이 사별(死別)이든 생이별이든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따뜻한 품을 떠난 아이들과의 생활은 제가 그 동안 얼마나 사치스런 고민에 빠져 있었는가를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 중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안가고 자기들과 같이 지내는 저를 이상한 형이나 오빠로 보고, 학교에 안다니는 어린 꼬마들은 내가 주는 라면땅 한 봉지로 하루를 기쁨으로 보내며 제 뒤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애들의 굶주림이 먹을 것이 아니고 가족의 ‘정’임을 알게 됐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도 크지만 사실 따뜻한 가족의 품이 없는 현실은 다른 부족함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는 것을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두주일 정도 보육원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공부가 금방 원상으로 회복되진 않았지만 더 이상의 세상 원망은 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 해 여름에 내가 깨닫게 된 가족의 ‘정’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내겐 삶의 최고 가치가 되었습니다.

평소 말씀은 없으시지만 묵묵히 저를 지켜봐 주시는 아버지, 밖의 일이며, 가족들 돌보느라 손발 마를 날 없으셨던 어머니, 그리고 한 이불을 덮고, 한 솥밥을 나눠 먹는 동생들과의 ‘정’은 혼란과 방황을 겪던 내 십대의 무력감과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원망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이 됐습니다.

여러분도 거친 세상 속에서 부모, 형제, 또 부부 간의 정(情)이 삶의 의미가 되고, 결국엔 나를 지켜주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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