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 시절의 작사자 함효영.(왼쪽) 작가 최독견의 사진이 들어있는 ‘승방비곡(외)’ 책 표지(2004·도서출판 범우 출간)

필자가 정작 함씨(함태헌 사장)를 만난 것은 시비를 보고 온 며칠 후인 7월 13일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체코의 프라하 광장 앞에 있는 유서깊은 옛 시청 건물을 본떠 만든 서교동의 캐슬 프라하 빌딩 4층에 있었다.

그는 체코와 관련있는 사업도 하고 있다. 그와 한 시간 반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씨는 시인의 3남 5녀 8남매 중 막내. 시비에는 차남이라고 되어 있는데 함씨는 삼남이다. 그가 시비를 세우게 된 동기는 이랬다.

2000년 가을 우연히 경포대 해변에 있는 ‘윌’카페에 들렀다가 카페 주인 윤천금씨(가수)가 피아노를 치며 ‘사공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노래가 끝난 후 자연스럽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함씨는 자신이 이 노래 작사자의 아들임을 밝혔고, 그 뒤 윤천금씨를 비롯해 강릉의 뜻있는 분들이 의기투합, 다음 해에 경포 호숫가에 시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시비는 당초 호수안으로 뻗어있는 잔교 앞에 있었다. 조각품인 작은 청동배 전면에 호수에 뜬 달 모양의 돌을 조각해 시를 새겨 넣었다.

그런데 2002년 테풍 루사때 경포호수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 시비가 물에 잠기면서 호수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시비가 무겁고 물이 깊어 건지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의 위치에 시비를 다시 세웠다.

함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작사자에 대해 정리하면 이렇다.

함효영은 황해도 재령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강릉 함씨다.

20대 후반이었던 1930년대 초 어느날 시조묘가 있는 강릉에 갔다가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사공의 노래’다.

그 뒤 평소 교분이 있던 홍난파가 그의 시에 곡을 붙였다.

‘사공의 노래’는 홍난파의 중기에 속하는 가곡으로 알려져 있다. 시를 지은 때가 1932년이라고 한다. 1932년이면 함효영이 27세, 홍난파가 34세다.

함씨는 선친이 해주고보를 졸업했으며, 그 후 일본 도쿄대에 유학을 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를 잠시했고 30대에 사업을 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주한 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함효영은 1927년 10월 동아일보 황해도 황주(黃州)지국 기자로 임명된 기록이 있다.

함효영은 다재다능했다. 젊은 시절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시와 소설 두 분야를 넘나들며 글을 썼다.

그가 쓴 시와 소설 등이 일제때 발행되었던 조선중앙일보(1930년대 6년간 발행됐던 일간신문) 등에 남아있다. 문인으로서 함효영은 주요한, 심훈, 이석우씨 등과 교분이 있었다.

1934년 5월 16일 동아일보는 이해 동경에서 재 일본 동경 한인문인들이 월간문예지 ‘조선문인’을 발간키로 하고 ‘조선문인사’를 창립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는데, ‘조선문인사’ 소속 문인으로 마해송, 유치진, 윤복진 등과 함께 함효영의 이름이 올라있다.

훤칠한 미남이었던 그는 2~30대 시절 한때 영화배우도 했다.

‘승방비곡(僧房悲曲)’이란 영화에서 주연을 했다.

‘승방비곡’은 소설가 최독견이 1927년 5월부터 9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1930년 5월 31일 개봉됐다. 이구영 감독의 작품이다. 주연배우로 주삼손, 성춘경, 이경선, 김연실, 윤봉춘 등이 소개되어 있다. 함효영이 주연이었다면 주삼손이란 예명을 쓴 것 아닐까?

함씨는 선친이 당시 예명을 썼는데, 어떤 예명을 썼는지 형제중에 아는 이가 없다고 했다.

당시 영화에 출연한데 대해 할아버지(함효영의 부친)가 대노하셨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함씨는 말했다.

‘승방비곡’은 사랑하는 남녀(최영일, 김은숙)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 결혼식 당일 아비가 다른 남매임을 알고 괴로워하며 결국은 헤어진다는 내용으로 요즘의 ‘막장 드라마’를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다.

승방비곡은 이 소설의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여주인공 김은숙의 어머니가 결혼식날 음독전에 남긴 ‘유서’가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이 소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유서’의 내용이다.

유서!

“영일과 은숙아,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딸아…. 나는 이제 저 생의 문을 열며 이 글을 너희 두 남매에게 쓴다…. 영일아 나는 지금 이 시간이 아니고는 이십육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하루도 잊어 본 적 없는 나의 피를 나눈 너를, 나의 아들아 하고 불러보지 못한 나는 얼마나 애달팠으랴!

---(중략)---

내 아들아, 딸아. 이 어미에게도 이십육년전이라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할 이야기는 이십육년전보다 좀 더 올라가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열여덟 되던 해 봄에 어떤양가집 며느리로 출가했다. 남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남의 아내로서 불행했다. 출가한지 오 년후인, 내가 스물세살 되던 해 가을에 그 남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나는 남편없는 시집에서 남편을 추억하며 바람 부는 황혼, 달 밝은 새벽, 청상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다. 나는 청춘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승방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영일아. 그 승방이라는 것이 네가 이십육년간 쓸쓸하게 자라난 운외사 승방이다. 그 때 그 절의 방주가 곧 너의 고독한 생명을 키워 준 너의 스님 해암이었다.

이정식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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