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 ‘직지’의 편찬자 백운스님이 1374년 입적한 후 이 책이 출판 진행 중이던 때의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획기적인 정치변동이 발생한다. 중국은 세계 정략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아 기마 민족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돼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서 ‘몽고의 평화’가 사라지게 된다.

일본 없고 고려만 표기

인쇄술의 전파는 여론 형성과 전달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서서히 정치생활을 변모시켰다. 고대 중국의 상형문자와 이집트 시대 벽돌문자 시대를 거쳐 1377년 우리나라에서는 ‘직지’를, 그리고 1454년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금속활자로 출판하면서 인류 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기술은 1470년 프랑스 파리로 전파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 고려와 독일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들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

직지’가 간행될 무렵 유럽에서는 중세봉건시대의 위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때도 한창 백년전쟁(1337∼1453) 중이었고,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왕조가 들어선 이후 대공위시대를 지나 남독일 도시전쟁(1377-1389)이 진행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 이전에는 카를 4세(Karl Ⅳ, 1346∼1378)와 벤첼(Wenzel, 1378-1400)이 다스리던 때이다.

현재 우리의 ‘직지’가 소장돼 있는 프랑스의 당시 왕은 샤를 5세(재위 1364∼80)였다. 그는 몸이 너무나 약하여 기사의 체격을 갖출 수 없었지만 생각은 상당히 현명해 ‘현명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샤를은 재위기간 중 백년전쟁 초기의 패배를 만회하고 국내에 얽힌 혼란한 내전을 정리해 한동안은 프랑스 군주제의 위신을 회복했다. 취미로 음악과 독서의 애호가였던 그는 이때, 지도에도 관심이 많아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아라곤의 국왕 페드로 4세(1336∼87)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했다.

오늘날 바르셀로나 지방이며 당시 카탈루냐는 지도제작술이 최고 수준이어서 아라곤 국왕 페드로는 지도제작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태인 아브라함 크레스크에게 프랑스 국왕 샤를이 부탁한 지도제작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카탈루냐지도’는 샤를 5세가 문예의 후원자답게 ‘왕립도서관’을 만들어 지도를 보관한 것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직지’와 함께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중세 지도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지리적 지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면 ‘직지’와 이 지도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라고 본다. 프랑스는 지금이나 그때나 한결같이 자료 보관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카탈루냐지도는 모두 12쪽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의 4쪽은 달력, 태양, 달, 별자리, 황도의 경로 등 천문학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나머지 8쪽이 ‘세계지도(Mappamundi)’를 이룬다. 한 쪽의 크기가 69x49cm이니 지도만도 5.5mx 3.9m에 이르는 거작이다. 지도 가운데 앞부분의 4쪽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과 소아시아 반도, 지중해 연안의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을 꽤 자세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나머지 4쪽은 중동에서 중국, 인도에 이르는 지역을 보여주며, 동쪽 끝에 ‘카올리(Kao-li)’를 표기하여 고려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일본을 말하는 ‘지팡구(Zipangu)’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유럽이 14세기 말에 카올리나마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몽고제국을 통한 지리 지식의 확대를 입증해 준다.

무역으로 인한 인쇄술 전파 추측

카올리란 말은 마르코 폴로보다는 루브룩의 여행기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몽고인들이 고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중국 아래쪽 물 건너에 고려가 있다”고 한말에서 물을 강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을 통역의 잘못으로 바다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루부룩은 그의 여행기에서 고려는 섬나라라고 했고 카탈루나지도에서도 섬으로 표기된 것이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4년에 인쇄한 ‘42행 성서’가 ‘직지’보다 78년 늦게 금속활자로 인쇄됐다. 이는 자체 개발했기 보다는 세계지도에 고려가 표기된 점으로 보아 몽고제국의 유럽 정복과 실크로드나 지중해를 건너 육지와 해상을 통한 무역으로 고려의 인쇄기술이 전파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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