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통일 (2)
우리의 소원은 통일 (2)
  • 충청매일
  • 승인 2011.11.1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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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이천 청강산업대학 안에 있는 ‘우리의 소원’ 노래비.(왼쪽) 현재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우리의 소원’ 악보와 가사.

삼일절 기념 라디오 특집 어린이 노래극을 위해 만들었던 ‘우리의 소원은 독립’은 작곡 이듬해인 1948년 주제가 통일로 바뀌었다.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라는 노래를 부를 이유가 더 이상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1945년 8·15 광복 이후 이번에는 남북 분단이 점차 고착화 되면서 민족의 염원이 ‘통일’로 바뀌었다. ‘독립’을 ‘통일’로 바꾼 것은 당시 문교부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노래는 1950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제목은 그때부터 ‘우리의 소원’이 되었다. 교과서에 실릴만큼 곡이 좋았고 ‘독립’을 ‘통일’로 바꿔도 가사의 흐름에 전혀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안병원 선생을 2011년 11월 11일 저녁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컨벤션센터(옛 하림각)에서 열린 제7회 우리가곡의 날 기념 디너 음악회때 두 번째로 만났다. 안 선생은 필자에게 위의 사실들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의 소원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우리 민요 ‘아리랑’과 더불어 남북한 주민들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노래중 하나다.

우리 교과서에 실린 것이어서 남한에서만 오랫동안 불려지다가 1989년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해 부른 이후 북한에까지 널리 퍼졌다.

임수경씨는 당시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국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에 참석했다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서 돌아왔다. 곧바로 구속되어 3년여 옥고를 치렀다.

북한에서는 임수경씨를 ‘통일의 꽃’이라고 불렀다.

북한에서는 이 노래 두 번째 행의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를 “이 목숨 다바쳐 통일, 통일을 이루자”로 가사를 바꿔 부른다고 한다. 우리쪽에서도 그렇게 부르는 이들이 많다.

북한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사를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노래는 원래 1절뿐이다.

안병원 선생은, 북한에서는 이 노래의 주제를 2절은 ‘평화’로 3절은 ‘자주’로 바꿔 부르더라고 했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때 우리측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6·15 남북 공동선언에 서명한 후 수행원들과 손을 잡고 함께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통일에 대해 최고의 상징성을 가진 노래가 된 것이다.

‘우리의 소원’ 노래비 찾아서

필자는 2011년 10월 20일 ‘우리의 소원’ 노래비가 있다는 경기도 이천의 청강문화산업대학을 찾아갔다. 정문에는 드나드는 차들을 통제하기 위한 차단기가 내려져있었다. 차가 그 앞에 서자 경비원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단풍이 반쯤 물든 아담한 교정에서는 가을 냄새가 물씬 났다. 노래비를 찾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를 주차한 곳이 마침 본관 앞길이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노래비는 바로 본관 앞 오른쪽 정원 안에 있었다.

남북 분단을 상징한다는 쪼개진 화강암 위에 검은색 노래비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악보와 가사가 함께 새겨져있었다. 안병원 선생의 친필 악보다.

그런데 3행 가사가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 통일”로 교과서의 가사와 조금 달랐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정식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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