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한영숙류 태평무를 보고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지난달 13일 (사)벽파춤연구회 공연에서 보여준 박재희의 한영숙류 태평무는 공연제목인 ‘명불허전’이라는 말처럼 명성에 걸맞는 명무였다.

잠시 그때의 공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객석이 숨을 죽였다.

절제와 위엄을 보인 귀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백성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순간 객석은, 귀인의 날숨과 들숨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저마다의 작은 몸짓으로 귀인의 호흡을 따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이 느껴지는 묵중한 발디딤 사이에는 백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고뇌가 서려있고, 느리고 단순한 상체의 움직임 그 사이에는 한없는 사랑이 가득하다.

느린 사위를 보며 잠시 상념에 들어본다.

비움의 미학이라 했던가….

귀인의 춤사위에는 그러한 ‘빈 공간’이 있어 우리의 눈을 허공에 머물게 한다.

‘전통춤’이란 말 사이에도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가늠키 어려운 희생 그리고 사람들이 존재하는 ‘빈 공간’이 있으리라….

잘게 부서지는 가락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다.

살포시 걷어 올린 홍색 속치마 아래로 하얀 버선발이 날듯이 경쾌히 내딛자, 객석에서는 아! 탄성이 흘러나온다. 구름 속을 거닐듯 희롱하는 귀인의 호흡에 우리의 흥은 차오르고, 단아하고 정갈하게 그려내는 귀인의 손끝뿌림사위에, 태평성대를 비는 우리의 갈망도 더해갔다. 까다롭고 복잡한 장단을 유려하게 노니는 귀인의 발걸음은 경쾌하면서도 섬세하고, 관객을 향해 보내는 귀인의 미소는 우아하면서도 따뜻했다.

어찌 몰랐겠는가. 중전마마도 백성들도 그 발걸음 따라 풍년을 빌고 태평성대를 빌었으리라. 그렇게 한마음으로 빌었으리라.

가락이 휘몰아치고 감정은 고조되건만 귀인의 춤사위는 지나침이 없이 고요하다. 잦아지는 가락을 호흡으로 지그시 누르고는 깊은 마음만을 내보인다.

마침내 춤이 멈추었을 때 우리는, 백성을 향한 귀인의 진심을 보았다.

한영숙류 태평무는 절제된 궁중정재의 형태미와 흥이 살아있는 민속무용의 내재미가 조화롭게 녹아있는 이중적 구조다. 그래서 그 춤의 품격이 한층 격상되는 전통춤의 백미이다.

이런 점에서 박재희의 한영숙류 태평무는 격과 흥, 왕실과 백성, 이렇듯 깨어지면 안되는 중요한 두 가치의 절제된 균형을 이루는 춤이다.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귀한 춤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충분한 춤이다.

또한 박재희의 태평무는 한성준과 그의 손녀이자 제자인 한영숙의 태평무를 잇는 소위 성골의 춤이다.

한영숙류의 첫 전수자라는 역사적 의미성 뿐만아니라, 한영숙류 태평무가 갖고 있는 미학적 특징을 모두 잇고 있으며, 그 춤 속에 담긴 맛과 멋 그리고 세월의 마음까지 담아내고 있으니 진정한 태평무의 계보를 잇는 춤이라는 말이다.

박재희의 한영숙류 태평무는 ‘단아하고 기품있는 귀인이 온전한 한마음으로 기원해 격을 이루고, 흥겨움은 구름 위를 노닐 듯 자유롭고 평화로운 춤이다.’

어느 기쁜날, 다시 한번 박재희의 태평무를 보고 싶다는 절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김 율 / 극작가, 연출가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