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인도의 눈물 스리랑카에서-1

한해를 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 연말과 정초 무렵 인도비자를 다시 발급 받기 위해 스리랑카로 향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비자 받는 것이 많이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다. 유럽여행자들, 한국여행자들….

모두 이야기가 분분했다. 누구는 공항에서 퇴출됐고 누구는 비자를 다시 받지 못해 인접국에서 인도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 상태에 있다고 했다. 올해(2010년)부터 인도 정부가 장기체류하며 여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엄격한 규제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유는 종교선교활동이나 주변국을 드나들며 인도에 장기체류하는 가난한 여행자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등 인도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한국에서 인도인에 대한 비자 발급 규제가 지나치게 심한 것에 대한 보복성 조치라는 얘기도 돌았다. 실제 인도 정부에서는 영어 원어민 교사 및 한국 기업취업 등을 위해 인도인들을 한국에 내보내고 싶어 하는데, 한국정부에서는 인도인들 입국을 까다롭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정부가 한국인에 대한 비자발급 제한으로 맞대응 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소문들은 만나는 여행자마다 이구동성으로 전해졌다. 그러니 스리랑카를 가도 장기 축에 드는 6개월 비자는 힘들 것이라 예상하고 일단 스리랑카 행 비행기를 탔다. 비자라는 것은 개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받을 수 있다는 스리랑카 한국대사관 관계자의 조언을 믿었다.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이며 옛 수도였던 캔디에서 머물기로 했다. 여행자들이 주로 수도 콜롬버스보다는 캔디에 머물고 있었다. 캔디는 스리랑카 땅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캔디를 중심으로 여행 다니기가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고 인도 비자발급 또한 콜롬버스 보다 수월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우리가 숙소로 정한 것은 버마스 게스트 하우스였다. 버마스님들이 운영하는 숙소인데, 옛 영국 식민지시절 건축한 건물이어서 많이 낡고 유령의 집 같은 느낌이었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택했지만 어느 곳이나 하루, 이틀 머물다 보면 내 집 같은 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살기위한 본능인 듯했다.

거미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천장이나, 새까만 땟국물에 절은 듯 한 모기장, 움푹 꺼진 침대, 벌레가 기어다니는 공동 욕실. 언젠가 허물기 위해 이미 몇 년 전부터 정원 터에 신축공사를 하느라 어수선한 환경까지. 모든 것이 바로 익숙해진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스리랑카에는 우리처럼 인도비자 발급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버마스에도 몇몇 외국인들이 묵고 있었는데, 모두 우리와 처지가 같았다.

일본인 커플이 있었고 요가를 하는 프랑스 여인 나타샤가 있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인도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해 놓고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의 비자가 주어지기를 기도했다.

비자가 예상한 날짜에 나오지 않으면 비행기를 연장해야 하거나, 여러 가지 경제적인 손실이 많기 때문에 모두 제 날짜에 나오기를 기대했다.

그중 우리는 인도로 가는 비행기 일정이 가장 느긋한 편이었다. 보통은 1주일에서 열흘을 두고 예약을 해놓는데, 우리는 넉넉하게 20일 간격을 두고 비행기 예약이 되어 있었다.

결국 프랑스 여인과 일본인 커플은 비행기 티켓을 연장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었다.

연말에 정초가 걸려 휴일이 많아 계획보다 며칠씩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나도는 그 어려움 없이 모두 예상한 만큼의 비자를 받았고, 그중 우리에게는 더 큰 기적이 일어났다. 3개월을 예상했는데, 6개월이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일을 두고, 두고두고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현재 자국 아닌 인도 주변국에서 인도 비자 받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딸과 엄마라는 관계, 그 딸이 학교 다닐 나이이고 인도에 뭔가 물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셈이다. 비자가 나오던 날 우리들은 그 기적을 기념삼아 인도 대사관 앞에서 기념사진까지 찍으며 환호했다. 함께 비자를 받은 독일인 노부부가 캔디시내에 가서 차를 쏘겠다고 했다. 스리랑카 산 맛좋은 그린티를 마셨다. 흡족한 하루였다.

겨우 비자를 받고나니 스리랑카에서의 일상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처음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뭔가 분주하고 정신없이 호객 행위하는 남자들의 등살에 넌덜머리가 났었다.

사설버스에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혹은 거리에서 몇 십 미터를 따라와 집요하게 호객행위하는 남자들에게 질려 거리에 나서는 게 두려웠었다.

그러나 모든 두려움과 불편함이 한꺼번에 다 사라졌다. 가장 걱정하던 일이 기적처럼 해결되고 나니 모든 게 다 이해되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질리도록 호객행위 하던 상가 점원들의 집착이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느껴졌고 거리의 풍경은 우리나라 70년대 분위기와 닮아 오히려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저렇게 열심히 산다면, 언젠가는 스리랑카도 풍요로워 질 것이라는 희망도 보였다.

참,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자기 상황에 따라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덕스러웠다.

비자가 나온 후에 우리는 그제서야 마음 편안하게 스리랑카를 여행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차밭으로 유명한 엘르라는 고장이었다.

고산지대에 있는 엘르라는 도시를 가기 위해 우리는 내일 아침 기차표를 예약해 두었다. 산을 구불구불 돌아 하염없이 올라간다는 아주 느린 기차를 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었다.  

글·사진=김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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