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인도기행-손의 재발견

차례상을 차리는 가족들의 손길, 성당이나 사찰에서 신부나 스님들이 미사나 예불을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손길들은 참 경건해 보인다. 돌아가신 조상을 섬기든, 자신들이 믿는 신을 섬기든, 그 무엇을 섬기기 위해 준비하는 손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조심스럽다.

모든 자연환경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은 손이다. 그중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손의 힘이다. 손을 이용해 기도하고 손을 통해 마음을 전달하고 그 손을 따라 신께 가 닿는다고 생각한다. 기도나 맹세에 사용되는 상징적 의미로써의 손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손으로 제 의식을 준비하고 진행하므로 신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있는 모든 손들이 경건해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인도는 신들의 나라라고 했다. 그만큼 신을 영접하고 섬기는 일을 곳곳에서 흔하게 접한다. 그들의 일상생활이 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신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그 신들의 종류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각자 섬기는 신에 대해 누구도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띠루반나 마라이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곳에 와서 성자가 된 라마나 마하리시 때문이란다. 이곳 사람들은 라마나를 예수와 부처의 반열에 오른 성자라 하는데,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라마나 마하리시가 어떤 가르침을 폈고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를 다 알려면 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공부해도 모를 듯하다. 단지 주워들은 바로는 자신 안에 있는 참된 자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 참된 자아를 찾는 과정이 수행이고 그 수행을 위해 명상을 권하는 것이다.

띠루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수행자들이다. 신부, 목사, 스님 등 종교를 불문하고 이곳을 찾는다. 아무래도 참된 자아를 찾는 일이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종류와 다른, 개인의 문제인 모양이다. 수행자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도 명상을 통해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수행이나 명상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고 아직도 그것의 가치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그들의 기운 속에 면면히 흐르는 무엇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섬기는 손의 경건함 자체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가 도시를 정적이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주었다.

하루는 어딘가를 가기 위해 우리의 단골 오토릭샤꾼 칸난을 불렀다. 밖에서 칸난이 기다리고 있는데, 테리와 나는 어떤 문제를 놓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언성을 높여가며 말다툼을 하게 됐다. 우리 목소리가 밖에 있는 칸난에게 들릴 것을 알았지만 우리말을 못 알아들을 테니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끝도 없이 격앙되게 다퉜다. 그때 칸난이 조용히 내게 다가 왔다.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대고 “텐미니트 사일런스”라고 했다. 둘의 논쟁이 그칠 것 같지 않았던지 칸난이 다가와 “10분간 침묵해 보라”고 권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우리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내 멋대로 행동한 것도 부끄러웠고 돌이켜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로 괜한 언성을 높인 것이 부끄러웠다. 단 몇 초의 침묵으로 우리의 논쟁은 끝났다.

이 침묵은 띠루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배어 있는 덕목이었다. 그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말이나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던가. 그 후 나는 많은 말보다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행동이 소통하는데 있어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이것을 생활 속에 옮겨 습관화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내게 중요한 변화였다. 칸난의 그 행동은 어떤 성자의 가르침보다도 크게 와 닿았다. 이것이 수행과 명상하는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들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의 힘이라는 것도. 이 깨달음이 내가 띠루에 오게 된 필연적인 이유라고 생각되었다.

라마나 마하리시는 띠루에 와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세웠다. 그것이 오늘날 띠루라는 도시가 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쉬람이 되었다. 이 아쉬람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번씩 라마나 마하리시를 기리는 푸자(제사)를 드린다. 라마나를 잇는 제자들이 푸자를 주관한다. 어린제자들은 단상에 앉아 경을 읽고 서열이 높은 수행자들은 직접 제단을 꾸민다. 꽃을 마련하고 향불을 피우고. 거리에서 숱하게 보는 사원에서의 푸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돌로 조각된 신의 얼굴을 닦는 일이며 꽃을 목에 거는 행위, 음식을 갖다 올려놓는 행위들이 조심스럽고 경건해 보인다. 그들의 마음 깊숙이 신께 경배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손짓들이다.

띠루가 다른 지역과 달라 보이는 것은 이러한 진정성이 푸자를 주관하는 수행자들 뿐 아니라 우리의 친구 칸난과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서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모두가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사람들로 넘쳐 난다. 과일가게 아저씨나, 튀김집 아주머니나, 옷가게의 젊은 청년이나, 모두 말의 높이가 낮고 말이 적고 온순하다. 나를 돌아보며 나를 찾는 과정으로 진행하는 명상이 사람을 낮게 가라앉혀 주는 힘이 있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열 마디 말보다는 10분 침묵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이들은 이미 깨달은 것이다.

내게 라마나의 경전보다, 그가 세운 아쉬람보다 더 의미 있었던 것은 이런 분위기의 도시속에서 침묵의 힘을 체험하고 조금이나마 그것의 중요성을 몸소 느껴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분위기는 사람을 잡는 묘한 자석의 힘이 있다. 한 번 띠루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은 좀처럼 띠루를 떠날 생각을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나나 테리 역시 띠루라는 도시에 함몰되어 떠나지지 않았다. 어떤 독일인은 10년 이상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고 어떤 일본여인은 20년째 살고 있고 어떤 미국인은 이제 막 띠루가 좋아져 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은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과정 속에서 욕심과 욕망으로 점철돼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자신의 참 모습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된 자신은 그 헛된 욕망과 아집과 욕심을 다 버리고 새털처럼 가볍게 살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결국 이 도시에 남게 된다.

우리는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비자가 만료되는 것도 모르고 불법체류를 감수하며 띠루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띠루를 떠나게 되었다. 띠루를 떠나며 우리가 살던 공간을 정리하는데 아득했다. 평생 수행자로 사는 사람들은 등에 진 보퉁이 하나가 전부라는데 우리는 겨우 5개월을 살다가 마무리 하는 살림살이가 왜 그리 많은지. 이게 내 어깨에 내 스스로 지운 삶의 무게와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것이 짐처럼 부담스러워졌다. 천을 떠다 만든 침구, 김치 담그던 플라스틱 통, 밥솥, 프라이팬, 냄비, 칼과 도마, 접시, 책상…. 한국에서라면 언제 어디서고 다 필요한 것들이지만 여행자인 우리가 이걸 다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하고 정리하는 일이 처음 띠루에 와서 살림을 장만할 때보다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뭔가를 처음 시작하는 의욕을 떠나는 마음이 따라잡을 수는 없을 터다.

우리가 사용하던 살림살이 중 몇 개는 우리 뒤를 잇는 한국여행자에게 주었고 대부분은 오토릭샤꾼 칸난에게 돌아갔다. 나를 일깨워 주었고 우리가 아플 때나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의 발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아이가 셋이고 가난한 칸난에게 책상이나 냄비, 프라이팬들은 요긴한 살림살이가 될 것이다. 그는 다음에 다시 우리가 띠루에 오게 되면 그때도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철썩같이 믿는다. 우리는 로컬 버스를 타고 타밀나두 주도시인 첸나이 공항으로 향했다. 비자를 다시 받기 위해 스리랑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하룻밤을 달려야 하는 길이 어찌나 허전했던지 덜컹거리는 로컬버스 안에서 테리와 나는 서로 부둥켜 안고 어두운 띠루의 밤을 한없이 내다 보았다. 다시 와 볼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스리랑카에서 비자를 받아 첸나이로 돌아온 후 뱅갈로드로 갈 계획이었던 기차표를 버리고 다시 밤 버스를 타고 띠루에 왔다. 마침 띠루가 성수기를 맞고 있어 방구하기도 힘들고 다시 또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생활을 하기에는 우리의 생각과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다. 우리는 1주일을 머물다 당초 계획대로 뱅갈로드를 거쳐 함피로 가기로 했다. 다시 같은 로컬버스를 타고 첸나이로 가서 첸나이에서 밤기차를 타고 뱅갈로드로 향한 것이다.   

글·사진=김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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