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인도기행-‘성자의 도시’ 띠루반나 마라이

인간이 태초에 자연과 관계를 맺은 것은 손을 통해서가 아닌가 한다.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수공업적 창조 행위인 기술문명, 건설, 악기, 수공예품, 예술 등이 손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발달하고 있는 현대문명은 갈수록 손의 동작으로 만들어지는 것 보다는 머리나 입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우월하다고 여긴다.

생각해보면 머리나 입보다 손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이 세계의 모든 게 가능했다는 것을 잊는 것이다.

그 손의 능력을 누구보다 믿고 그 손의 정직함으로 살아가는 선크와르를 만난 것은 오로빌에서 내륙으로 3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띠루반나 마라이라는 도시 아루나 찰나 산 중턱에서다.

오로빌 생활을 접고 띠루반나 마라이라는 도시로 옮긴 것은 한국을 한 번 다녀온 직후다. 하루만, 띠루반나 마라이에 여행차 다녀오자며 테리와 나는 길을 나섰다. 그런데 그 하루가 5개월이 넘게 된 것이다.

띠루로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오로빌에 살고 있는 한국 오로빌리언들이 좋은 곳이라며 추천해 단지 그곳이 궁금할 뿐이었다. 대체 그곳이 무엇 때문에 좋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무심하게 발길이 그리로 향했다. 폰티체리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와 게스트 하우스를 구해 간단한 짐을 풀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오로빌리언들의 조언대로 성산이라 불리는 아루나 찰나산(인도인들이 섬기는 신중의 하나인 시바신의 실체라 함)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도는 오른돌이를 하기로 했다.

예로부터 이곳을 섬기는 인도인들은 아루나 찰나산을 한 번 돌면 신과 한 번 영접하는 것이라 해서 이 산을 매달 보름날마다 돌며 그 자체를 신성시했다.

우리같은 초보자들은 한 바퀴 걷는데, 넉넉히 5시간을 잡아야 했다.

중간에 쉬어야 하고 물과 간식도 사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그 길을 걷는 것이 좋다하니 무작정 시도를 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아루나 찰니산 둘레를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금은 복잡한 스리 라마나 아쉬람(성자 라마나 마하리쉬가 세우고 머물러 성지가 된 아쉬람) 앞의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농촌풍경이 펼쳐지는 지점으로 가니 그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고요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는 풍경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함께 평온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생각은 나 혼자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테리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테리가 느닷없이 ‘여기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여행자로 사는 것이고 오로빌에 오래 머물 이유도 없으니 이곳으로 옮겨 보자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치되었다. 오로빌로 돌아가 우리는 짐을 챙겨 다시 띠루반나 마라이로 돌아와 이 특별한 도시의 영적인 힘을 맘껏 느껴보기 시작했다.

집을 구하고 자리를 잡았다.

인도 음식들이 입에 맛아 잘 먹지만 돈을 절약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한국식으로 시장을 봐 밥을 해먹기도 했다. 매일 아쉬람을 가게 되고 보름날이면 오른돌이를 하고 운동삼아 아루나 찰나산을 오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시간들이 지나면서 조금씩 띠루반나 마라이의 존재에 대해, 이 도시의 특별한 기운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아루나 찰나산 중턱에는 라마나 마하리쉬가 어머니와 함께 7년간 기거하며 수행했다는 아쉬람이 있다. 아침이면 수도승이 푸자를 드리며 샨팅(경전을 읽는 일)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 좋다는 소문이 나 있다. 그 샨팅도 듣고 운동삼에 아침에 산을 오르곤 한다.

산을 오르다보면 산 중간중간에 돌조각을 판매하는 사람들을 여럿 본다. 우리는 무엇을 사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으니 여러 차례 산을 올랐어도 돌조각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유난히 눈길이 가는 돌 조각가(스톤 워커)가 있었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열 댓 곳의 돌조각 상점 중에 유난히 잘생긴 외모가 눈길을 끌었지만 사람이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차 띠루에 온 한 한국인과 아침 샨팅을 듣고 내려오다 그 여인이 부처얼굴을 조각한 돌조각에 관심을 보여 우리의 눈길을 끌었던 그 스톤워커에게로 이끌었다.

기왕 작품을 사려면 우리가 맘에 들어 하는 사람에게 사도록 권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돌 조각가 선크아르(30)에게 말을 걸게 된 것이다. 선크와르는 8세때부터 아버지에게 돌조각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배웠단다.

인도인들의 직업이 대부분 가업으로 물려받는데, 같은 경우인 셈이다. 그런데 이 선크와르 만큼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돌조각 일을 가르치지 않고 있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주로 사용하는 붉은 돌은 라자스탄(북인도)의 한 산에서 가져오는 것이고 하얀 돌은 아루나 찰나산에서 생산되는 돌인데, 너무나 많은 돌들이 사라지고 있어 곧 산의 돌이 바닥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을 파내는 일이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일이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만큼은 그 일을 하게하고 싶지 않단다. 참 정직한 아버지이고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선크와르와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한참 나누었다.

아루나 찰나산에 자리를 잡아 돌조각을 시작한 것은 11년이 되었고 1주일에 한 두번은 가족들과 템플에 가서 푸자를 올리고 종종 비루팍샤(아루나 찰나산에 있는 동굴로 수행자들이 명상하는 곳)에 가서 명상을 하기도 하는데 특히 작업 중에 배가 고플 때는 명상으로 배고픔을 잊기도 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는 돌조각을 하며 침묵에 빠져들 때 평화로운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그 때가 가장 기분이 좋은 때란다. 이때 어떤 영감을 얻기도 한다고.

결국 그에게 돌 작업하는 노동의 과정 은 그 자체가 명상이고 수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곳이 아닌 아루나 찰나산에서 일을 할 때 충만감이 더 크다는 그는 비수기 때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돌조각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가 자랑삼아 자신의 여자친구를 얘기하다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독일 여인인데, 그 여인이 돌조각 판매를 많이 돕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놀렸다.

부인 저우나가 알면 질투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함박 웃으며 그저 친구사이일 뿐이라고 얼굴이 발개져 말했다. 그러잖아도 아내가 그 사진을 보고 오해해 한 번 싸웠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참 정직한 남편이었다.

선크와르의 손바닥에는 동전만한 크기의 단단한 못이 박혀 있었다.

직업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길 수 밖에 없는 굵은 못이었다. 그 못이 박힌 손이 참 정직해 보였다. 문득 나는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내 생애 매순간 내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얼마나 정직했는지 자문해 보았다. 사람을 마주하면 못난 손톱을 갖고 있는 손부터 감추고 싶어했고 많은 부족한 것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대며 살았다.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고 정직할 수는 없었던가. 참 부끄러웠다.

한국여인이 불상조각을 한개 샀고 우리는 마침 그가 시바 손을 조각하고 있어, 그 시바 손조각을 한개 샀다. 그가 우리에게 아루나 찰나산 돌로 만들고 세모형태의 아루나 찰나산을 닮고 산스크리트어 ‘옴(기를 모으는 의성어)’자가 새겨진 작은 돌조각을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이튿날 다시 산에 오르며 그가 화사하게 웃는 모습의 사진을 뽑아 전해 주었다.

아루나 찰나산을 오르면 돌조각품을 파는 길거리 상점이 여럿 눈에 뜨인다. 하지만 이 돌조각들을 직접 현장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곳은 선크와르 외에 한 두 곳이 더 있을 뿐이다.

열 곳 정도 되는 상점들은 도시에서 물건을 해와 판매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눈에 뜨인 선크와르가 다른 돌조각 상점의 점원들과는 분명 달라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선크와르와 같은 이 도시의 토박이들이나 수행과 명상을 위해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나, 공통점이라면 모두가 성자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이런 사람들 속에 우리가 몸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이미 우리는 축복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여기서 조금씩 침묵을 생활화하기 시작했고 스스로에게 먼저 정직해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내게 중요했다.

글·사진=김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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