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중국 사천성 성도의 망강루 공원에서 만난 설도상의 모습.

우리 가곡으로 유명한 ‘동심초(同心草)’의 원작자가 1200년 전 중국 당나라 때의 여류시인 설도(薛濤·768?-832?)라는 이야기를 이 지면을 통해 한 적이 있다.

 

          동심초(同心草)

              설도 원작, 김억 번역, 김성태 작곡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설도의 ‘춘망사’ 제3수>

 

얼마전 필자는 설도가 살던 중국 사천성 성도에 갔었다. 주된 목적은 장족(티벳족)과 강족(챵족)이 주로 사는 사천성 서북쪽 ‘아바장족강족자치주’(동티벳으로도 불림)를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성도를 지나면서 설도의 흔적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도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도시내 망강루(望江樓) 공원에는 아바주에 다녀와 중국을 떠나기 전날인 7월 31일에야 갈 수 있었다.

망강루 공원에는 설도가 좋아했다는 각종 대나무들이 입구부터 가득 들어차 있었다. 대나무의 종류만도 150종에 이른다고 했다. 공원에는 설도기념관, 설도상, 설도정, 설도의 묘, 죽(竹)문화 전시관, 그리고 공원의 이름이 된 망강루 등이 들어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설도의 모습을 이런저런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놓았고, 설도가 교류했던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원진(元[禾眞]), 두목(杜牧) 등 당대의 이름있는 문인들도 그림으로 설명해 놓았다.

한쪽에는 설도가 원진을 향해 무언가를 써보내는 듯한 내용의 그림도 그려져있다. 동심초의 원본이 된 춘망사(春望詞, 봄을 기다리는 노래)가 연하의 남성이었던 원진을 향한 설도의 연모의 정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타내려는 것 같았다. 기념관 안쪽에는 설도가 앉아있는 모습의 대리석상이 있었다. 기념관 밖에는 대나무 숲을 거니는 모습의 설도상도 있다.

설도는 자신이 시를 쓸 종이를 여러 가지 꽃물을 넣어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그 종이가 당나라때 황궁에서까지 유행했다는 설도전(薛濤箋)이다. 그녀가 종이를 만들때 길어 썼다는 설도정(薛濤井)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명나라 때까지도 이 우물을 이용해 설도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청나라 강희제 때(康熙 3년, 1664년) 성도지역을 다스리던 지사 기응웅(冀應熊)이 이 곳을 설도를 기리는 유적지로 만들었다. 우물 기념비에 쓴 설도정이라는 한자도 그가 직접 쓴 것이라고 설명돼 있었다. 공원의 이름이 된 망강루는 청대에 지은 높은 누각인데, 설도정 바로 가까이 있었다. 바로 옆에는 양자강의 지류인 금강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망강루(강을 바라보는 누각)인가 보다.

처음에는 숭려각(崇麗閣)이라고 했다. 청대에 설도를 기념하여 지은 누각이라고 알았는데, 현지에 가보니 달랐다. 망강루를 짓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광서12년(1886넌)이었다. 당시 이 자리에는 오래된 낡은 탑이 서 있었는데 붕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성도 사람들은 당시 성도의 청년들이 중앙무대에 가기 위해 치르는 국가시험(우리 조선시대의 과거 같은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는 것이 낡은 탑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성금을 모아 누각을 커다랗게 지었다. 누각은 3년만인 광서 15년 1889년에 완성됐다. 망강루는 성도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망강루 공원 자체가 온통 설도와 관련된 기념물과 상징물, 그리고 설도가 좋아했다는 대나무 등으로 차 있어서 망강루 역시 설도를 기념하는 건축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했다.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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