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왕십리역 앞의 김소월 흉상.

‘진달래꽃’의 시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의 한 사람인 김소월(金素月·본명은 정식·1902~1934). 김소월은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했던 1923년 9월 도쿄에 있었다.

그는 이해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쿄상대 예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대지진을 겪었다.

평북 정주군 곽산의 고향집에서는 소월의 소식을 몰라 애를 태웠다. 소월이 어렵게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이러한 대재앙의 소식이 전해졌으니 집안 분위기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김정식이란 이름이 신문에 실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사망자 명단 속에 있었다. 김정식은 소월의 본명이다. 가족들이 받은 충격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월의 집은 갑자기 초상집으로 변했다.

소월의 숙모인 계희영씨는 그의 저서 ‘내가 기른 소월’(1969)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지진의 피해란 너무 막심했다. 과장된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나 인명피해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하며 바다는 불바다로 변했다고 들었다.

땅이 꺼지고 바닷물이 끓어 올랐으며 온 천지가 진동하였다.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은 육지의 불을 피하려고 물로 뛰어들었다가 끓는 바닷물에 그만 온 몸이 익어서 그대로 죽어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의 식구들은 안절부절 동경에 간 소월로부터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문에 사망자 명단이 보도되었다.

혹시 잘못 되었으면 어떻게 하나 하여 초조하고 불안했는데 그 사망자 명단에 김정식 이름 석자가 실려있었다.

--- 정식(소월)이 죽었다는 보도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 소월의 어머니는 아들 잃은 슬픔과 아픔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일본에 소월을 보내 놓고 줄곧 불만이 많았는데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 보니 할아버지의 후회와 원망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 소월의 부고는 이렇게 할아버지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집안 식구들을 슬픔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며칠 후 일본에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소월이 쓴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습니까? 저는 무사하오니 안심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신문 보도속의 김정식은 동명이인이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안도했으나 소월에게 속히 돌아오라고 전보를 쳤다. 전보를 받은 소월은 가벼운 행장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을 안심시킨 후 도쿄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소월이 돌아오자 고향집은 잔치집 분위기였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식이 살아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었다.

소월은 가족들과 얼마간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족들의 만류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소월의 어머니는 “죽어 이별도 서러운데 왜 생이별을 하려고 그러느냐?”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마침내 소월은 일본행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소월의 일본 유학은 이처럼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초기에 중단되고 말았다.

소월은 일본 유학을 계속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고향에 남았으나 식민지하에서 그의 삶은 고단했다.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지식인이란 이유로 일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소월은 이후 줄곧 세월을 한탄하다가 이로부터 11년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에 발생했다. 사망자가 약 10만명, 행방불명이 약 4만명에 달한 최악의 참사였다.

지진 발생 다음날부터 불안한 민심을 자극하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무고한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의 관헌과 자경단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학살 당했다.

학살된 조선인 수는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로는 233명 뿐이었으나,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의 수는 6천여명이었으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시 경제적 불황을 겪고 있던 일본이 지진으로 인해 한층 악화된 민심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재일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분석한다.

관동대지진으로부터 88년이 지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46분. 일본 동북지역 인근 해저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강진이 발생했다. 또 지진의 영향으로 발생한 쓰나미가 태평양 연안 지역을 초토화했다. 관동대지진을 초월하는 대재앙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은 제일 먼저 일본에 구조대를 보내고 참혹한 불행에 빠진 일본을 돕자고 전국민이 나서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일본에 최대한의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앙금은 잠시 잊고 그들의 상처를 먼저 치유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그럼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진정으로 가까운 이웃으로 함께 발전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지금 한층 성숙해진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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