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인환, 이진섭, 유두연, 박태진 (오른쪽부터·1955)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쓴 일주일 후쯤 세상을 떠났다. 1956년 3월 20일 밤이었다.

세상 떠나기 3일 전인 3월 17일에 천재 시인 이상(李箱·본명 김해경·1910~1937)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그 당시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 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서 두꺼운 겨울 외투를 봄까지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빈 속에 계속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됐다고 보는 것 같다. 세상 떠나던 그 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 밤 8시30분쯤 집에 들어온 후에 가슴이 답답하다면서 생명수(활명수 같은 것)를 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9시경 숨을 거뒀다.

그의 아들 박세형은 20년 후인 1976년 아버지 박인환의 시들을 모아 박인환 시집 ‘목마와 숙녀’를 내면서 후기에 선친의 사인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아버지께서 타계하신지 오래 되어 사인(死因) 등에 관하여 궁금해 하시는 독자가 계실 것 같아 이 기회를 빌어 말씀해 둔다. 아버지께선 평소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그날도 친구분들과 함께 명동에서 약주를 드신 후 귀가, 심장마비로 별안간 돌아가셨다. 1956년 3월 20일 밤 9시 경이었다.”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 태생이다.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용모였다. 6·25 전쟁때는 경향신문 종군기자였고, 그 후 대한해운공사에서도 일했다. 친구와 영화와 스카치 위스키인 조니 워커를 좋아했다.

“장례식 날, 많은 문우들과 명동의 친구들이 왔다.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고 조병화가 조시를 낭독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에는 수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따랐고 그의 관 속에 생시에 박인환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 주고 흙을 덮었다.” (박인환 평전, ‘아! 박인환’, 강계순, 문학예술사, 1983)

‘세월이 가면’은 세상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쓴 시이기 때문에 첫 시집엔 없고, 앞에 언급한 사후 20주기에 맞춰 나온 시집 ‘목마와 숙녀’에 실려있다.

노래 ‘세월이 가면’과 관련해 수필가 조순제씨가 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제목의 눈물겨운 수필이 있어 여기에 간추려 소개한다. 

1950년대 후반 박인환 작시의 노래 ‘세월이 가면’을 언제나 흥얼거리던 J라는 공군 파일럿이 있었다. 생기기도 박인환처럼 훤칠한 미남이었다. 언제나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미인 약혼녀와의 결혼을 열흘 앞둔 어느 날 엔진 수리가 끝난 비행기에 평소 친절을 베풀며 가깝게 접근해 왔던 인접 부대 모 중위를 탑승시켜 시험비행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인접부대 중위가 비행기 뒷좌석에서 이 파일럿을 위협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다.

어떻게 위협을 당했는지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그 후 북한 방송에서 모 중위는 의거 귀순했다고 영웅처럼 떠들었는데, J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J씨의 약혼녀는 데보라카를 연상시키는 미모였다. 이 사건 후 그녀는 초혼도 재혼도 실패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수필가 조순제씨가 80세가 다 되어 요양병원 정신신경과에 입원해 있는 이 여성을 방문했는데,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과거 약혼자의 친구였던 조씨를 보자 그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곤 조용히 창문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가족들이 50년이 지나(근년의 일인 것 같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 명단에 J씨를 올렸으나 북으로부터 병사했다는 단답 밖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고 한다. 읽으면서 기분이 울적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운명의 이야기다. 그 노래 ‘세월이 가면’.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러온 노래였을까. 우리는 오늘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깊은 분단의 상처들을 이처럼 목격하고 있다.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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