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도(薛濤, 770~832)와 황진이(黃眞伊, 1500년대 초반, 생몰년 미상). 황진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대체로 익숙한 이름이지만 설도는 누구인가. 설도는 중국 당(唐)나라의 여류시인이고 황진이는 조선의 여류시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녀였다. 역사적으로는 700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으나 기녀로서 이처럼 시 작품과 더불어 이름이 후세에 널리 전해져 내려오는 예가 드무니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이 종종 비교, 거론되는 것이다.

특히 설도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대개가 아는 가곡 ‘동심초(同心草)’가 그녀의 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동심초의 내용과 동심초가 나온 설도의 한시 원전 ‘춘망사(春望詞)’에 대해서는 이미 한 차례 소개했으므로, 이번엔 설도에 대해 궁금증을 좀 풀어보고자 한다.

설도의 부모와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어 어느 것이 정설(定說)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성도에서 살다가 기생이 되었으며 뛰어난 시(詩)적 재능으로 인해 절도사 위고(偉膏)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고, 유명한 종이 설도전(薛濤箋)을 만들었다는데 까지는 대개의 기록이 일치한다.

어떻게 기생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두어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설도는 원래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아버지 설운(薛)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병사란 이야기도 있다)하고 곧 이어 어머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지할 곳이 없어 결국은 악기(樂妓·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 기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가 기생이 된 것은 아버지가 관재 낭비로 벼슬에서 쫓겨나고 남편 또한 전쟁에서 죽은 뒤 가문이 몰락하여 어쩔 수 없이 기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설도는 총명하고 시와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용모도 뛰어났다고 한다. 설도가 성도의 명기로 알려지게 된 것은 위고(韋皐)가 절도사로 부임한 후부터였다. 이때 설도는 18세였고, 위고는 40세였다. 위고는 설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설도의 명성은 성도 일대만이 아니라 곧 수도 장안까지 알려졌다. 만약에 설도가 위고를 만나지 못 했다면, 그녀의 시와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되었을까?

위고는 언젠가 그녀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관청의 책을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고 부하들이 반대하여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그 뒤 기생을 교서(校書)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토록 설도를 아끼던 위고가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21년간이나 절도사로 있었으니 설도에게 그 기간은 오랫동안 행복한 시기였다. 위고는 그녀를 기적에서 풀어주었으며 죽으면서 재산의 일부를 설도에게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설도는 위고가 죽은 뒤 40대 초에 그녀보다 열한 살이나 연하였던 당대의 유명한 젊은 시인 원진(元[禾眞·779~83 1)과 가깝게 교류했지만 그것이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동심초’가 들어있는 그녀의 유명한 시 ‘춘망사’는 떠나간 원진을 흠모하여 지은 것이란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짐작일 뿐이다.

설도는 원진 외에도 당시 유명한 문인, 명사들과 알고 지냈는데,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장적(張籍), 무원형(武元衡) 등이 그들이다. 그녀는 생전에 약 500편의 시를 썼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88수만 남아있다. 설도는 평생 품위를 잘 지키며 살았고, 만년에는 도교(道敎)의 여도사(女道士)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향년이 61세란 설도 있고 75세란 설도 있다.

설도와 관련해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설도전이란 작은 종이다. 그녀는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장강 지류인 금강을 일컫는 듯) 옆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시를 쓰기에는 성도의 종이 폭이 너무 넓다고 생각해서 직접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연꽃이나 맨드라미 꽃잎 등으로 만든 꽃물을 넣어 여러 색깔의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거기에 시를 쓰곤 했다. 이 종이는 당대에 유명했으며 황실에서도 사들였다고 한다.

200여년전 청(淸)나라 때 설도를 기려 완화계 옆에 망강루(望江樓)라는 누각을 짓고 주변에 그녀가 좋아했던 대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망강루 공원’이 되었는데 설도가 종이를 떴던 설도정(薛濤井), 설도의 묘소 등이 공원 안에 있다. 

그런데 설도와 비견되는 황진이는 어떠한가? 젊은 날의 이런 저런 에피소드는 전해오지만 그 후의 삶,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광복전에는 개성 동문 밖에 그녀의 무덤이 있었다는데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중국 사천성 성도 망강루 공원 내에 위치한 ‘설도의 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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