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세 탁 <전 충북대 교수·시인>

나이 들었다고 글샘이 마르랴. 순진한 미소는 영락없는 10대 소년이고, 창작에 대한 정열은 스무살 청년이다. 누가 그를 팔순으로 볼까. ‘팔순 청년’ 원로시인 벽서(闢曙) 오세탁(80).

그는 충북 문단의 최고 원로이며, 척박한 충북 예술계의 반세기의 토대를 일군 주역으로 후배 예술인들에게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근대에서 광복부터 6·25전후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충북 출신 문인들은 터전을 떠나고 그들이 떠난 빈자리는 문화 페허가 됐다. 전쟁이 남긴 가난과 비통함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할 때 문학과 예술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서 오 시인은 충북문인협회를 창립하면서 충북 문화의 리더로 발돋움했다.

그가 오랜 세월 몸 담아온 ‘문학활동의 텃밭’인 충북문인협회를 거쳐 충북예총 제9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충북 예술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충북에서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높이기위해서 각 시·군마다 협회를 결성하고 지역예술계의 조직을 강화했다.

오 시인은 “예전의 충북 문화계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충북예술인들의 단결된 결속뿐이었다. 그 당시 살길은 각 시·군에 흩어져있는 예술인들을 모으고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 충북에도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충북 문화계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점을 하나 꼽았다. 과거의 예술인들은 절박한 상황속에 서로 화합하며 힘을 모아 문화계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지금의 예술인들은 각자 입맛에 맞는 예술단체를 양산해내면서 각 단체의 구미에 맞는 주장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되지 못하는 예술인들이 만들어가는 충북 문화계의 힘은 목소리를 잃고, 문화정책은 답보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오 시인은 “서로의 이익을 따지지 말고 순수한 예술인의 마음가짐으로 다시 돌아가 충북 문화계의 부흥을 젊은 나의 후배들이 다시 한번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서로의 이익이 상충돼 진정으로 필요한 예술정책이 사장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형식적인 예술축제를 지양하고 기능적이고 실속있는 문화정책이 생산되는 충북의 예술문화단체를 기대해본다”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예술인들이 작품활동에만 매진하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예술단체의 행정력이 뒷받침 돼주어야 한다. 다른 곳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문화정책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하면 안된다. 예술단체는 그 지역에 맞는 실질적인 문화정책을 선도하기위해 있는 단체로 전문화된 문화행정가와 연구자들을 키워 충북 예술인들을 위한 참신한 문화정책이 충북예술단체의 머리에서 나와야됨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충북 예술가들이 충북을 떠나고 있다고 염려했다. 나무는 뿌리를 내릴 땅이 있어야 열매를 맺듯, 예술가들에게도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을 터전이 필요하지만 지금의 충북 예술인들은 역마살 낀 ‘떠돌이’처럼 서로 앞다퉈 충북을 떠나고 있다.

오 시인은 “작품활동이 어려운 환경을 탓하며 떠나는 예술인들의 말도 맞다. 각 분야별로 예술인들의 재능을 보여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평가해주고 보아주는 도민과의 소통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술인과 도민이 함께 충북 문화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도민과 소통하며 마음껏 생각의 나래를 펼수 있는 곳. 그곳이 충북이길 바라는 것은 그나 지금의 예술인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 시인은 “나는 충북에서 ‘영원한 현역’을 꿈꾸며 팔순의 나이에도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예술인들이 행복한 ‘문화선진도’가 다름아닌 충북이 될 수 있도록 후배 예술인들 힘있는 발걸음에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남은 일생을 함께하겠다”며 충북 문화계의 후배들에게 작은 희망을 전했다.

한편 ‘법학교수’, ‘행정관’, ‘교사’, ‘시인’ 등 그의 이름 석자 앞을 수놓는 수많은 직함들은 얼마큼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단연 보여준다.

그가 본격적인 글쓰기를 한 것은 스무살이 조금 넘었을 때다. 1953년 중학교 교사로 첫 교편을 잡을 무렵, 그는 국민일보(충북신보의 전신)에 수필 ‘불소동’으로 등단했다. 그 후 충북신보의 지면을 통해 문학활동을 하게 되면서, 지역 문인들과 어울렸다.

그후 20년간 충북대 법학교수로서 학자의 길을 걸었지만, 시인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에게 글은 항상 목마름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의 글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집은 ‘오늘의 정좌표(72년)’, 시문집 ‘무심천에 뜬 구름(90년)’,  칼럼집 ‘문화재를 향유한다(95년)’, 시집 ‘더듬거리는 세월’(2006년) 등이 전부이지만 글 속 알알이 들어있는 작가의 치열한 삶속에서 꽃피우고자 했던 문인으로서의 꿈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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