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부 귀농

내가 쓴 소설을 읽고 단 한사람이라도 춤판에 가는 것을 머뭇거린다면 그보다 큰 보람은 없을 것이다. 창빈은 자신이 그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를 꼽아본다. 무엇보다 춤판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곳이다.

그것도 평범한 일상이 집약된 것이 아니라 눈물과 한숨, 실패와 좌절이 녹아든 막장이다. 생존경쟁을 하다가 패배해서 오갈 데 없는 패잔병들이 숨어드는 곳이다. 소설이든 시든 희곡이든 어떤 형식으로든 문학화할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그렇게 많은 작가나 시인들이 있지만 춤판을 소재로 글을 쓰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막장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그늘이라는 이유로 감추기에 급급했다. 점잖은 작가는 글도 점잖은 것만 써야한다는 선입관 때문이었다.

춤바람 난 중년 남녀들의 난잡한 이야기를 쓴다는 게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혹 제비나 꽃뱀들의 신출귀몰한 이야기로 한탕하려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책 한 권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고 싶은 욕심쟁이들이 춤판 이야기를 과대포장해서 쏟아낸 경우는 있었다.

춤을 배워 제비로 성공하고 싶다는 심리만 조장시키는 내용이었다. 악서중의 악서였다. 창빈은 춤판 이야기를 자기가 꼭 써야하는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 더 꼽는다. 춤추는 뺑이들의 마음과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화시킬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체계적으로 문학수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신문사에서 사설 칼럼 등을 수년간 써온 글쟁이다. 문제의식을 갖고 춤판을 관찰해서 정리할 수 있는 분석력과 문장력도 갖추고 있다. 뺑이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보다는 그들의 입장도 이해하면서 간과할 수 없는 폐해만 정리해 문제제기를 하자면 이런 정도의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는 게 창빈의 생각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바빠지는 기분이다. 춤판을 빠댄 세월을 응축하려면 적어도 1년은 잡아야 할 것이다. 3권 분량의 소설을 쓰자면 아침나절은 꼬박 글 쓰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것이다. 글 쓰는 생각을 하니 쓰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돌이켜보면 창빈의 젊은 날은 부실언론 때문에 찌든 삶이었다. 봉급도 줄 수 없는 신문사가 기자들을 수십 명씩 고용해 놓고 일을 시키면서도 먹고사는 문제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언론탄압이라는 소릴 듣지 않기 위해 방치하고 있다.

부실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해독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개혁을 하지 않고 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아슬아슬한 공존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전국각지에는 언론이라는 탈을 쓰고 사기 공갈 협박 등을 일삼는 사이비 언론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때마다 민초들이 상처를 받고, 아프다고 신음하지만 외면하고 있다. 이게 지금까지의 언론정책이었다. 창빈의 가슴이 또 답답해진다. 그런 것들을 잊기 위해 춤을 배웠고, 미친 듯이 춤판을 빠대고 다니는 동안만은 잊고 살 수 있었다.

뒷골이 아파 온다. 목덜미가 뻐근해진다. 창빈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라디오를 튼다. 라디오에서도 골치 아픈 얘기만 나온다. 창빈은 농촌생활을 설계하면서 마음을 돌린다. 글만 쓰면서 오전을 보내고 나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그때마다 창빈은 일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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