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부 귀농

아내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기위해 베란다로 나간다. 베란다에 서서 아파트 마당을 내려다본다. 남편의 승용차는 보이지 않는다. 남들이 다 출근한 한낮에도 멀건이 혼자 서 있는 모습이 남편처럼 처량 맞았다. 남편은 낯선 화물차로 다가가더니 문을 연다.

‘언제 차를 바꿨지?’

그렇다면 무슨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즉흥적으로 저러는 게 아니다. 그동안 차분히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실직자가 중형차를 굴릴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화물차를 타고 다니는 남편의 모습은 처량해 보인다. 정장이 잘 어울리는 남편이 점퍼를 입고 화물차를 몰고 나가는 것은 이웃들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불과 서너 집만 빼놓곤 다들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이제 그 대열에서도 탈락한다는 생각을 하며 아내는 남편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는 하이칼라 대열에 낄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창빈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청주로 달린다.

대통령 별장으로 유명한 청남대IC에서 대청댐 쪽으로 30분쯤 달리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가 마음이 외로울 때면 일 년에 두서너 번쯤 찾아가던 곳이다. 어릴 때 같이 컸던 불알친구가 그곳에서 농장을 하고 있다.

도시에서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하다가 크게 실패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슨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은데,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이것저것들을 다 정리해 가지고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산골짜기 따비밭에다 과수를 심고 가꾸기 시작한지 3년쯤 되었다. 창빈은 춤판이 지겨워질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농장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제법 틀이 잡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사과를 속아내면서 그 친구가 말했다.

“내년부터는 제법 수확도 할 수 있을 거야.”

창빈의 눈엔 그런 건 전혀 안 들어왔다. 주변 환경이 좋다는 생각만 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깨끗한  물 같은 것만 눈에 들어왔다. 인심도 그에 못지않을 순박할 것이다. 청주에서 불과 30분 남짓한 거리에 이렇게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맨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어느 화창한 봄이었다.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라고 시작되는 동요가 떠올랐다. 그 동요를 들을 때마다 그런 곳이 정말 있을까 싶었다. 그곳이 진짜 그랬다.

꽃은 앞산에도 뒷산에도 울긋불긋 피어 있었다. 꽃 대궐처럼 황홀했다. 온갖 꽃들이 외지사람들의 넋을 빼놓는 계절이 봄이라면, 여름은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이 도시사람들을 홀렸다. 오장육부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물도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 두메산골 골짜기마다 맑은 물이 흘렀다. 숲 속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했다. 가을은 그곳도 풍성했다. 골짜기마다 밤이며 도토리가 여물어 갔다. 숲 속에는 버섯을 비롯한 온갖 산채들이 널려 있었다.

알밤을 줍고 도토리를 따고 산채를 뜯는 가을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그러나 겨울은 외롭고 쓸쓸했다. 온산에 하얗게 눈이 쌓이면 차도 못 들어오고, 사람도 꼼짝을 못했다. 산짐승들마저 움츠러들었다. 계곡마다 나뭇가지마다 소복이 쌓여있는 눈을 보며 처음엔 신기해했다. 그게 경치 좋은 감옥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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