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부 뼈저린 후회

‘내가 당신 친구하고 통화를 했다고 해서 그게 바로 불륜일 수는 없잖아? 백화점에서 장사하는 친구가 세금문제로 속을 썩인다고 해서 그 문제를 부탁하느라고 전화한 것뿐야. 당신이 맨 날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줄 아나보지? 개 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이렇게 역공을 하면 뭐라고 할까?

‘당신이 무식하게 나올 줄 알고 내가 이것까지 다 준비를 해뒀지.’

남편은 녹음테이프를 갖고 나와 틀지도 모른다. 그 테이프에선 남편이 없는 밤마다 완수 씨하고 속삭였던 은밀한 대화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그가 남긴 음성메시지도 다 들어 있을 것이다. 날짜 별로 순서대로 다 흘러나올 것이다. 혜원은 싸움도 제대로 못해보고 다운당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장롱을 뒤지고 있다. 테이프가 하나 있다. 테이프를 들어보며 얼굴을 붉힌다.

‘내가 정말 이런 말을 했나? 이런 소릴 듣고 날 뭐로 보았을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남편한테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한 생각으로 몸을 떤다. 남편이 그 정도로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 같아도 난리가 났을 것이다. 남편이 왜 말을 하다가 말았는지 이해가 된다. 오죽 더러운 생각이 들었으면 말을 못했을까?

오죽 더러웠으면 저걸 꺼내 갖고 와서도 차마 보여주지도 못하고 훌쩍 집을 나갔을까? 자신이 너무 했다는 생각이, 하필 남편친구하고 그랬느냐는 후회가 뼈 속 깊이 파고든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런 걸 다 아는 남편에게, 내 문제로 속을 썩고 사는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들기 까지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 했을까? 그랬으니까 청주춤판을 불쌍한 모습으로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막상 남편과 정리를 한다고 치면 남편만한 남자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령 더 나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쳐도 애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다행인 건, 아직 돌아올 수 없는 강은 건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해의 소지가 있고, 마찰의 소지도 충분하다. 마음속으로는 친구남편하고 간음을 수없이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갑자기 한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친목계 날 부부끼리 만날 때마다 그 친구의 남편이 유독 혜원을 좋아하며 유난을 떨었다.

그때마다 그 친구는 무척 곤혹스러워 했지만, 혜원은 그게 좋아서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어째서 난 이렇게 뻔뻔해진 것일까? 도무지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뻔뻔해 진 게 다 그 춤 때문이다. 그 안에만 들어가면 다 남의 남자 훔치는데 정신이 팔린다. 그걸 잘해야 똑똑해 보이고, 그걸 잘해야 유능해 보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염돼 뻔뻔해 진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강을 건너기 전에 들킨 게 천만다행이다. 우선 완수 씨에게 오늘 못나간다고 전화를 해주자. 혜원은 시계를 본다. 벌써 1시 20분이다. 그가 한참 외출 준비를 할 시간이다.

“박완수입니다.”

아주 기분 좋은 목소리다. 그럴 것이다. 연휴 첫날에 사모하던 여자와 춤 약속을 하고 막 나가려는 길이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이젠 완수 씨의 마음 같은 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막 나가는 길인데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저 못나가요.”

“왜요?”

“앞으로도 못나갈 거 같아요. 영원히.”

“갑자기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네, 큰일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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