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부 뼈저린 후회

“친구들하고 약속하는 소리 들었잖아.”

“그게 목욕탕 가는 여자의 복장이라고 생각해?”

남편의 얼굴이 비웃는 표정으로 바뀐다. 누굴 심청이 애비인 줄 아느냐는 얼굴이다.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다. 혜원은 남편이 핵심을 찌르는 말에 멈칫한다. 자신이 생각해도 목욕탕 가는 여자의 복장은 아니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다가 목욕은 저녁때 갈 거야.”

“기왕 그렇게 나섰으면 좀 더 당당해 질 수 없어?”

이건 단순한 시비가 아니다. 뿌리를 캐겠다는 말투다.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정색을 한다. 남편을 매섭게 쏘아보며 반격자세를 취한다. 머리속에는 청주춤판에서 비굴한 웃음을 던지며 여자들에게 손을 내밀던 남편의 추레한 모습이 보인다.

“그게 누가 할 소리인데 당신이 먼저 하는 거야?”

그녀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남편도 급소를 찔렸는지 비틀한다.

“당신의 가면을 벗겨줄까?”

혜원도 비틀한다. 처음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겨우 정신을 차려서 남편의 급소를 찾는다. 단 한방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급소를 찾는다.

“버젓이 살림까지 차리고 살면서 누굴 욕해?”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하지 마.”

“그러는 사람은 무슨 증거 있어?”

“증거! 꼭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

남편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더니 양복주머니를 뒤지는 모양이다. 저 인간이 무슨 증거를 잡았다고 자신만만하게 겁을 줄까? 설마 완수 씨하고 청주 춤판에서 놀다가 같이 나오는 걸 본 것은 아니겠지?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어떻게 알겠어. 남편은 봉투 하나를 꺼내 들고 나오다가는

“더러워서 정말…, 인간 같아야 무슨 말을 하지.”

말 꼬릴 감추면서 도루 들어간다. 더 이상의 확전은 피하겠다는 표시다. 남편이 그렇게 나오는데 기를 쓰고 싸움을 걸 이유는 없다. 혜원은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여자는 풀이 죽어있다. 아까와 같은 모습이지만 분명히 그녀는 아니다. 뭔가 기가 꺾였고, 뭔가가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남편은 결정적인 때 급소를 공격하는 재주가 있다.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아주 예쁜 모습으로, 남편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모습으로 나가서 남편 친구를 안달 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속상한 마음이 풀릴 것 같다. 오늘 완수 씨를 만나면 순순히 보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도 어떻게든 틈을 찾으려고 정신이 없었다. 모텔을 지날 때마다 멈칫거렸다. 저 쪽에 모텔 간판이 보이면 속도를 줄이며 브레이크를 밟으려했다. 그때마다 혜원은 값싼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남자를 제지했다.

“엉뚱한 생각하는거 아니죠? 상상 하지 마세요.”

급할 때마다 브레이크를 밞았다. 그때도 그랬었는데,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올게 틀림없다. 혜원은 은근히 그런 기대를 하며 곱게 화장을 했다. 남자가 덤비면 피하고 싶고, 욕심을 내지 않으면 약이 오르는 게 여자의 마음이다. 혜원은 내복을 갈아입는다. 얼마 전 새로 산 거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거들까지 입는다. 결혼하기 전에는 늘 입고 다녔지만 아이를 낳고부터는 잘 안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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