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부 탈락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감히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래서 단절의 벽은 생겨났다. 단절의 벽은 세월이 흐를수록 높아만 갔다. 그 벽은 점점 높아지더니 더 멀리 넓게 퍼져 나갔다. 처음엔 아주 적게 시작된 벽이었지만 마침내 나만 빼놓고 온 세상을 다 가로막는 꼴이 되고 말았다. 서운한 마음에, 야속한 마음에, 미운 마음에, 증오하는 마음 때문에 점점 더 높이기 시작한 담은 이제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키는 벽이 되고 말았다.

“결국 나 자신을 가두는 담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세월 앞에서는 마침내 아물고 마는 게 세상 이치지만 나만은 정반대였다. 단절의 벽 주위에 무관심의 강까지 파놓았으니 세월이 흐를수록 담은 높아졌고 강도 깊어졌다. 처음엔 그게 옳은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물이 아니고는 그렇게 나올 순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담을 치고 강을 팠던 것이다. 그게 결국은 날 고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안 보고 살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단절이라는 방법으로 벽을 쌓기 시작한 게 불행의 시초였다. 화영은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이렇게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내 주위에 과연 누가 있어 이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미우면 밉다고 드잡이를 해서라도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냈어야 했다.

어쩌다가 난 이 지경이 되어 혼자 울고 있는 것일까? 혜원의 차는 강변을 따라 미끄러지듯 달린다. 혜원은 화영이가 주임승진에 탈락한 게 서운해서 입을 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이해한다. 지금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되겠느냐고 짐작한다. 그저 혼자 조용히 있게 내버려두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운전만 하고 있다.

󰡐요즘 청주 춤판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혜원이가 화영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미끼를 던진다. 사실 혜원은 청주춤판이 궁금하다. 답답하면 휴가 가는 기분으로 가끔 놀다가 오는 곳이다. 얼마 전 남편이 청주로 내려오고 나서부터는 겁이 나서 갈 수가 없다.

몇 달 동안 가보질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충청권의 뺑이들이 다 청주로 몰린다는 것이다. 카바레끼리 경쟁이 붙어서 공짜로 입장을 시키고,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편네들이 한꺼번에 다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장마 때 송사리 잡으러 나오는 낚시꾼들처럼 전국 제비들이 다 몰려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청주춤판은 삼복더위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소문을 들었다. 혜원은 화영의 심란한 마음을 달래주는 데는 역시 춤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남편과 부딪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다.

‘한참 일할 시간에 춤판을 기웃거리겠어?’

가능성은 적지만 장담할 순 없다. 남편과 부딪치고 안 부딪치는 건 순전히 오늘의 일진이다. 돌이켜보면 청주춤판은 대부분 달콤했었지만 가끔 쓰라린 기억도 있었다. 이상하게 그곳에 갈 때마다 시숙을 만나곤 했다.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불안했었다. 그게 오늘도 부담스럽다. 오늘 또 시숙을 만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다 남편까지 만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겹친다.

‘까짓 가족회의 한번 하지 뭐.’

이렇게 작정을 하니까 겁날 것도 없다. 경우를 따져도 꿀릴 게 없다. 기왕 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즐겁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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