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부 슬픈 여행

저 작은 물방울이지만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그저 잠시 막아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물의 저항은 계속된다. 호수를 만들고, 폭포가 되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땅을 뚫고 들어가 지하수가 되기도 한다.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녔으니까 천하무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저 자연의 품에 안겨, 산이나 바위처럼 말없이  살고 싶다. 그런 심정이 간절할수록 창빈의 눈은 부산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저기가 안성맞춤인데…’

방금 지나간 저 산비탈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창빈은 집을 짓고 밭을 일군다. 봄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정성껏 가꾸고, 가을에 거두는 농부의 삶을 상상한다. 이젠 그만 방황하고, 저런 곳에 정착해 살고 싶다. 그것도 하자면 목에 가시부터 빼야하는데, 그놈의 가시가 빼지지 않아서 꼼짝 못한다.

창빈은 바른 손을 펼치더니 손가락으로 갑자(甲子) 을축(乙丑)을 따진다. 올해만 지나면 재(財)가 들어온다. 재가 들어온다는 것은 재산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올 한해만 지나면 땅도 팔리고, 새 일거리도 생긴다는 뜻이다. 그렇게만 되면 춤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창빈은 다시 손가락으로 육갑을 따지다가 깜짝 놀란다. 재와 함께 형살(刑殺)도 들어온다.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운세다. 안양 불여우 사건으로 망신은 당했지만 감옥엔 가지 않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마누라조차도 눈치를 못 챘다. 감옥을 간 것보다도 더 아픈 상처를 받았지만 외견상으론 조용했다. 형살 중에서도 삼형살(三形殺)이 들어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열차는 12시 정각에 제천역에 도착한다. 공기부터가 다르다. 천안보다는 한결 서늘하다. 긴소매를 입고 올 걸 잘못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여기에 올 때마다 단골로 들리는 음식점이 있다. 역 앞에 있는 중국집인데 자장면을 맛있게 한다. 중국요리 집이 아니라 진짜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집이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혼자 앉아있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가 좋아서 이 집을 찾는다. 다들 일행이 있는데, 다들 끼리끼리 어울려 음식을 먹는데, 나만 혼자 외톨이라는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자장면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고는 곱빼기를 시킬 걸 잘못 했다는 생각을 한다.

자장면을 먹었지만 이빨은 쑤셔야하고, 거피도 한잔 마셔야한다. 역 대합실로 다시 들어가서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면서 천안으로 돌아 갈 때 타고 갈 열차시간을 확인해둔다.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딱 알맞은 시간이다.

시내버스는 아주 많다. 주공 장락아파트 단지로 직접 가는 차도 많고, 구인사나 영월로 가는 차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도 된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차는 구인사로 가는 시내버스다. 보살행색을 한 여자들이 차에 오른다.

첩첩산중에 자리 잡고 있는 절 구인사! 그곳에 가서 병든 몸을 요양하고, 외로운 마음을 추스르며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은 모양이다. 버스 안은 그런 차림의 여자들로 만원이다. 버스를 타고가면서 제천시내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제천! 어쩌다 난 이 땅과 악연을 맺었을까?’

이곳에 땅을 산 이후 제천은 창빈에게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이 됐다. 고향도 아니고, 살다가 정이 든 곳도 아니다. 물론 친척이나 친구가 사는 곳도 아니다. 그저 전 재산을 투자해서 땅을 샀을 뿐이다. 그 이유만으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고속도로를 착공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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