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 소의 해에 이충렬 감독의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5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40년을 같이 한 소가 죽자 매장한 뒤에 노부부가 절을 찾아가서 소가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서원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을 하는 워낭소리는 말 못하는 짐승과 인간의 끈끈한 정과 함께 워낭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세월의 변화에 관객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노부부와 늙은 소의 일상을 농촌의 풍경에 어울리도록 잔잔하게 그려내는 영화는 농촌이 고향인 중년 이상의 한국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일깨우고 인간의 이기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현대인에게 잠재해 있는 인간적 마음을 끄집어내고 있다.

영화에서 최 노인은 소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한다. 늙은 소의 눈물을 보고 노인은 소를 팔지 않았다. 늙은 소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나뭇가지를 나눠 진 노인의 굽은 허리가 인간사 모든 것을 짊어진 듯 무거워 보이지만 노인과 소의 관계만 같을 수 있는가.

농경사회의 잔재가 살아있던 1970년대까지 소는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일부였고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경운기가 있기 전까지 소가 없는 농촌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소는 소유의 개념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과거 세대(世帶)라고 하면 혈연인 식구(食口)와 생구(生口)로 대별하고 있다. 이에서 생구는 식객이나 노비 그리고 집안에서 기르는 소-돼지와 같은 가축을 말한다. 그래서 황희 정승의 고사와 같이 소 듣는 데선 소가 들어서 좋아하지 않는 말까지 삼갔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인간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 우리의 전통이고 관습이었다. 우리 속담에 며느리는 소 잘되는 집안에서 얻으라고 하고 있다. 바로 소를 인간과 동일시 한 우리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농촌이 고향인 사람에게 소꼴을 벼야 하는 것은 어린 시절 힘든 일이었지만 소를 돌보는 것은 자신의 꿈을 키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세월이 변해서 개천에서 용이 되기 위해서 서울로 유학을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소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의 소가 한우가 돼 먹을거리 재료가 되고 소갈비가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은 20~30년도 안 된다.

인도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소 이야기다. 사람과 차가 다니는 대로변에 소가 누워 있고 어디를 가나 소똥과 소 오줌 냄새가 진동을 하는 나라, 가난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면서도 소고기를 먹지 않고 하루 종일 인도 여인들이 소똥과 생활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야기 거리가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인도에서 소 우상=불살생=채식주의의 관습과 교리가 만들어진 역사적 모습을 보면 우리의 소에 대한 관념의 발전과정과 다르지 않다. 아리안 족이 목축업에서 정착된 농경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소는 중요한 삶의 수단이었다. 인도에서 소는 경작의 중요한 수단이었고 소의 부산물인 우유, 커드(curds), 기 버터(ghee butter), 소 오줌과 소똥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이러한 삶의 근원이 힌두교와 연계해 소 우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인도에서 소는 신이고 소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은 어머니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소의 위치가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변화됐다. 사람과 함께했던 소는 하나의 소유물이 되고 식탁의 재료가 되고 있다. 그래도 소들은 소죽은 귀신처럼 말이 없다. 워낭소리는 인간 삶에 있어서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워낭소리는 그 함께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지난 해 소고기 먹는 것으로 촛불을 든 우리에게 노인과 소는 무엇을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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