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방’ 사실 우리에게는 마릴린 프렌츠의 소설로 가까워진 말이다. 한 인간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현대 여성의 삶의 본질을 추적, 그들의 갈등과 문제들을 제시한 미국 여류작가 마릴린 프렌츠의 첫 장편소설의 제목이다.

여자의 방은 은밀함이 숨겨진 뉘앙스를 풍긴다. 은밀함은 섹쉬어르리티의 전형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이자연의 방에서는 그 이상의 카르마가 있다. 그녀의 방은 괴기스럽다 못해 불길하기까지 하다. 조심스러워지며 그녀에게 접근하기 부담스러움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방을 정의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공간속에서 알 수 없는 슬픔과 환상이 교차하며 지나간다. 실제로 존재 하는 듯한 실제하지 않는 대상은 그가 제작한 작품이 작업실에서 혹은 전시장 안을 기어 다닌다. 수천마리의 애벌레에서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성적 충동과 갈등은 탐미스러운 도착이 아닌 미화된 사실주의의 재현으로 첫번째 징후일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가 그녀의 징후로 보고 제작한 작품은 작업의 과정에서는 또는 경험에서 스스로에게 경고하듯 거대한 음모로 펼쳐 보인다. 작가가 식인 식물이라 명명한 붉은 핏덩이의 식물이 여성의 내부에서 꺼낸 온갖 장기와 같은 모습으로 아직도 혈액을 토해내고 있다. 여성의 내부. 질과 자궁을 연결하는 성기의 생식의 본능과 쾌락의 통로. 작가는 변질적 이성을 감춰진 허구로 보고 드러내어 펼쳐 보임으로서 이성의 증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정신적 내면에 흐르는 혈액은 어떻게 생겼을까? 포유류의 여성은 어떤 생식기를 갖고 성장을 하는가? 동물적 본능으로 의인화된 성기능을 갖는가? 동물의 성은 번식본능이지만 인류의 성은 쾌락의 중심에 있는가? 끝없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 작가의 자화상은 식인식물 중심에 앉아있다. 그 여인은 바뀐 동공의 색으로 세상의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개라고 한다. 개의 본능 속에서 자신의 성기를 핥아 여성의 생리기능을 조절하고 섹스 본능에 충실한 것이 자유본능의 두번째 징후가 아닐까 한다.

고통은 영원한 인류의 숙제다. 스스로 육체나 정신을 단련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단계에 이르는 자학은 마조히즘이다. 하지만 상대가 스스로라는 부분에서 가학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라는 사디즘과도 혼용될 수 있다. 대상과 비대상을 자신의 존재로 읽고 표현해 작가의 숙제로 묶어 놓고 관객들에게 당신들 스스로를 치유하도록 묵시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세 번째 징후는 즐김과 섬김의 강력한 요구로 봐야 한다. 변형된 위치의 성기에서 혹은 포유류에서 발견하는 여성의 성기에서 가학적인 감상의 요구와 그 안에 복잡하게 연결된 사고의 편린을 모아 채집하려는 의도의 그물망이 감상의 끝에 펼쳐져있다. 감상자는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작가 그녀의 식인 식물의 제물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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