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반의 농촌생활은 거의가 궁핍했다. 그녀의 친정집은 남들보다 더 어려움을 겪던 터라 입하나 덜자고 갓 스물 넘은 딸을 출가시켰다고 한다. 시집도 농사로 연명하는 집이라고 했다. 철모르는 나이에 시부모 모시고 농사지으며 4남매를 낳았지만 어린 아이들을 두고 남편은 먼저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을 보면 그 후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당뇨수치가 높아 음식도 가려먹어야 되고 기운이 없어 일어나질 못해도 영양주사 한 병 맞을 수가 없다고 한다. 육체가 부실해지다보니 뭔가 조금만 먹어도 체한다고 하는 그녀는 바람이라도 조금 불어오면 날아갈 것만 같다.

오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던 내 어머니도 양쪽 무릎관절을 인골관절로 바꾸는 수술을 하셨다. 수술하기 전 병원에서 찍은 무릎사진을 보고 막내 동생은 너무 가슴이 아파 울었다고 했다. 모든 부모가 다 그러하듯 내 자식에게는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자식 욕심이 유별났던 어머니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오남매를 품에서 떠나보내고 아버지와 함께 노년을 평온하게 지내고 계시지만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신다.

우리는 흔히 힘들게 사는 사람을 보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앞으로는 좋은 날이 있을 거야, 하고 위로의 말을 건낸다. 고난의 시간 속에서 얻어지는 물질적인 여유로움과 깨닫게 되는 지혜와 가치는 삶의 밑바닥에서 충분한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가려서 선택한 경우에는 사서하는 고생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선 고생문이었고 남은 건 병든 몸이다. 젊어서 고생을 사서하다니 병든 몸만 남는데 누가 선뜩 고생길로 접어들겠는가, 대 다수의 젊은이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스갯소리로 넘겨버리고 만다. 작금의 시대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자식까지 쉽게 버리지 않던가.

아픈 그녀를 바라보자 안타깝다. “차라리 결혼하지 말고 공장이래도 다녀서 돈을 벌지 그랬어” 하자 그녀는 기운 없이 대답을 한다, “그땐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몰라”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을 도로 삼키려니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우리가 겪는 삶의 굴곡들이 누군가에겐 봄날의 소풍이 되고 누군가에겐 거대한 사기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 ‘자식들만 잘된다면 몸이 부서진들 무슨 상관이랴’ 그녀도 그랬다. 시집간 딸과 사위가 참 잘한다고, 아들들이 엄마 고생한 것을 알아주니 다행이지 않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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