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社 선임 엔지니어 박민관씨

   

경기불황이 지속되면서 취업박람회장마다 구직자로 북새통을 이루는 등 ‘취업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기업들이 채용인원을 크게 줄여 캠퍼스에 취업한파가 거세게 몰아칠 전망이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방대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라는 세계 초일류 기업에 입사,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가는 박민관씨(36)를 통해 도전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살펴본다.

박씨가 처음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6년 여름.

당시 충남대학교 전자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대기업에 지원할지, 이동통신사로 갈지, 아니면 방송국 시험을 볼지, 컴퓨터 회사에 입사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다.

박씨는 “생각만 한 것이지 오라는 곳은 한곳도 없고 다 시험을 볼까 고민하던 때였다”며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마이크로소프트에서 ‘테스터’를 뽑는다는 것을 보고 입사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박씨가 그때 지원해서 입사 시험을 본 곳은 모두 3곳 정도로 유독 마이크로소프트에서만 지원서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나서야 면접을 보자는 연락을 받은 박씨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멍해진다고 한다.

박씨는 “처음 면접은 현재 한국지사 연구소 소장인 성석수 부장님(현 상무)이 했는데 여러 가지를 물으며 한 2시간 넘게 인터뷰를 했다”며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1주일 뒤 그 당시 연구소장이었던 홍선기 상무님(현 삼성전자 전무)이 인터뷰를 했는데 무려 5시간을 넘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지사에 근무하던 박씨는 2주간의 미국 출장을 가게 됐다. 박씨는 “미국 출장에서 느꼈다”며 “이곳에서 일해보고 싶다. 다들 자기 방이 있고, 하는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하던 프로젝트가 끝나면 미국으로 옮겨보자고 마음을 다졌다”며 “1년 후 Visual Studio 6.0 한글판이 나오고 미국으로 전근을 갈 수 있다는 메일을 보고 이력서를 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쉽게 생각했던 전근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이 회사에서는 부서 이동시에도 인터뷰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박씨도 우선 5명의 부서원들이 인터뷰(각각 1대 1로 면접하고 면접관이 자신의 의견을 다음 사람에게 알리면 그것을 기준으로 다음 면접을 시행)를 해야 했다.

처음 3명이 ‘부적합하다”고 판정하면 다음은 인터뷰도 없이 집으로 가야한다.

5명이 모두 통과하면 최종면접관과 다시 인터뷰를 해야 하는 데 앞의 5명이 모두 ‘된다’고 해도 이 면접관이 “아니다”고 판정하면 채용이 안 된다.

영어로 진행되는 6∼8시간의 면접이 하루에 다 진행되며 칠판에 코딩하고 나면 그 날 초죽음(?)에 이를 정도다.

박씨도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치며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 근무하게됐다.

박씨는 처음 한국마이크로소프트사에 입사 당시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어려움도 있었다.
대기업이나 이동통신사 월급의 절반을 조금 넘는 급여를 받은 박씨는 2년 동안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박씨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돈보다는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마음을 달랬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현재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박씨 자신을 다잡는 계기가 되고 있다.
회사입사 후 지방대 출신이라는 아픔도 느꼈다.

박씨는 “지방대 출신이라 어려운 부분은 회사에 입사하면서 느꼈다”며 “다들 어느 학교를 나온 누가 들어오면 일은 안 하지만 잘 할 것이라고 말하거나 같은 학교 출신들끼리 모이는 것을 보면 좀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 미국 본사에 근무하면서 더 이상 지방대 출신의 비애는 없었다.

박씨는 “어떤 때는 우리 팀원 중에 박사 1개, 석사 2개의 학위를 가진 사람도 있고 미국에서 유명한 대학을 나온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되진 못한다”며 “채용 시 고려의 대상이 되지만 평가는 일의 결과로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서 근무한다고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문화의 차이를 느끼면서 이를 극복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외국인이라고 영어를 천천히 말하거나 또박또박 말해주지 않았다.

박씨는 지금도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박씨는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가 가장 힘든 시기라고 토로했다.

박씨는 “현재가 가장 힘들다고 본다. 왜냐하면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새로운 것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며 “하지만 이런 것을 즐겨야하고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뒤를 돌아보면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이 힘들어 보이지 않게 느껴진다”고 충고하고 있다.

언젠가 중학교 시절 ‘마이크로소프트웨어’란 잡지를 보며 빌게이츠 회장이란 사람이 대단하다고 느껴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박씨는 현재 빌게이츠 회장과 머리를 맞대며 일하고 있다.

“인생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박씨는 “우선 얼마를 받고 어떤 직책이고, 회사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나중에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으로 쉽게 포기하거나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퇴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최소한 1년 이상 길게 보고 선택한 일을 겪어본 후 다시 진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좋은 일자리만을 찾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박씨는 얼마 전까지 테스트 팀 선임 소프트웨어 개발 엔지니어(senior software development engineer in test)로 ‘C# 언어’팀의 전반적인 테스트 기술을 기획하고 리드하는 일과 생산성 향상에 관한 일을 주도해 왔다.

현재는 애드센터(Adcenter)라는 팀으로 자리를 옮겨 선임 소프트웨어 개발 엔지니어(senior software development engineer)로서 애드센터(Adcenter)의 전반적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의 방향과 개선을 주도하는 팀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 졸업 시 여느 학생처럼 취업에 고민이 많았던 박씨는 돈이나 명예보다 자신의 원하는 꿈을 위해 착실히 미래를 설계해 왔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였다.
아직 자신의 꿈에 이르지 못했다는 박씨는 현재도 꿈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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